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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발디, 바로크 음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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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harvard 댓글 0건 조회 1,752회 작성일 10-10-24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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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 ; 1678. 3. 4 ~ 1741. 7.28)


안토니오 비발디는 '사계'를 비롯해 협주곡으로 유명한 작곡가겸 바이올리니스트인 비발디는 1678년 북부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상 마르코 극장의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지오반니 바티스타 비발디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가 큰 지진에 놀라는 바람에 칠삭둥이로 태어났다는 그는 어릴 때부터 시름시름 앓으면서 간신히 성장했다고 합니다. 이탈리아의 3대 음악 명문 중 한 집안 출신답게 비발디는 소년 시절부터 바이올린 지도를 아버지에게 충분히 받았고, 이것이 나중에 그가 바이올린의 대가로 성장할 수 있는 밑받침이 될 수 있었습니다. 15세 때 삭발하고 하급 성직자가 된 비발디는 25세 때 서품을 받아 사제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그해 9월 베네치아의 피에타 여자 양육원의 바이올린 교사로 취임했습니다. 이 양육원은 여자 고아들만 모아 키우는 일종의 고아원으로 특히 음악 교육에 중점을 두던 곳이었습니다. 비발디는 이곳에서 실기지도는 물론 원생들로 구성된 피에타 관현악단의 지휘를 맡아 했으며, 그들을 위해 여러 곡을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비발디의 음악이 대체로 아름답기는 하지만 다소 나약하다는 평을 듣는 이유가 이 당시 여자아이들을 위해 쓴 곡이 많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근대 바이올린 협주곡의 작곡 방법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평을 듣는 그는 79개의 바이올린 협주곡, 18개의 바이올린 소나타, 12개의 첼로를 위한 3중주곡 등 수많은 곡을 썼습니다. 뿐만 아니라 38 개의 오페라와 미사곡, 모데토, 오라토리오 등 교회를 위한 종교 음악도 많이 작곡했습니다. 허약한 체질임에도 불구하고 초인적인 창작 활동을 한 비발디는 자신이 명바이올리니스트였던 만큼 독특하면서 화려한 기교가 담긴 바이올린 협주곡들을 만들었고, 이 작품들은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페라의 흥행 사업에 손을 대고, 여가수 안나 지로와 염문을 뿌리는 등 그가 사제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했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의 여지가 있습니다. 자만심이 강하고, 낭비벽이 심했던 그의 성격도 갖가지 일화를 남겼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사람들의 빈축을 사 고향에서 쫓겨나다시피한 그는 각지를 전전하다가,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객사해 그곳의 빈민 묘지에 묻혔습니다. 비발디는 바이올린의 명수로서 전 유럽에 이름을 날렸으며, 생전에는 작곡가로서보다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더욱 유명했습니다. 비발디 자신은 작곡가로서 더욱 알려지기를 바랐다고 하지만, 당시 골도니라는 비평가는 그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비발디는 바이올린 주자로서는 만점, 작곡가로서는 그저 그런 편이고, 사제로서는 영점입니다. "비발디는 워낙 작품을 많이 썼으므로 사실 비슷 비슷하게 들리는 곡들이 여러 곡 있기는 합니다. 훗날 러시아 출신의 작곡가 스트라빈스키는 그에 대해 '똑같은 곡을 100곡이나 쓸 사람'이라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바로크 음악의 대들보라고 하는 요한 세바스티안 바하는 7세 연상인 비발디에 대한 존경심으로 그의 현악 합주곡 몇 곡을 건반 악기용으로 편곡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바로크 음악 연구와 감상이 활발한 오늘날 비발디는 코렐리, 바하, 헨델의 음악을 감상하는데 있어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비발디의 음악은 한때는 잊혀져 가는 듯 했지만, 2차 세계 대전 이후로 다시 소생해, 세인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이탈리아 실내악단에서는 그의 각종 악곡들을 빼놓을 수 없는 스텐더드 레퍼토리로 삼고 있기도 합니다.

주요 작품

협주곡 ; '제5번 A장조 바다의 폭풍우', '제6번 a단조 즐거움',
'제7번 D장조', '제18번 g단조', '사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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