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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디 - 그는 모짜르트 이외에는 스승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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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타라곤 댓글 0건 조회 1,633회 작성일 11-11-17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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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useppe Verdi (1813-1901) - 주세페 베르디

이탈리아의 작곡가 (출생지 - 이탈리아 베르가모)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분명히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형편에서 초보적인 지식을 얻기 위해 작은 도시에서 음악 공부와 작곡을 했다. 후에 베르디의 아내가 되는 마르게리타 (Margherita)의 아버지 안토니오 바렛치 (Antonio Barezzi)의 원조로 그는 밀라노에 갈 수 있었다. 밀라노에서는 기량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음악원에서 피아니스트의 길을 거부당하게 되는데, 베르디는 반대로 작곡을 하기로 마음 먹는다. 빈첸초 라비냐 (Vincenzo Lavigna)는 베르디에게 모짜르트와 하이든을 알게 했다. 그리고 이 롬바르디아 지방의 수도와 몇 곳의 극장 덕택으로 베르디는 도니제티, 벨리니, 바카이, 롯시니 등의 작품을 접할 수 있게 된다. 그는 매우 다행스럽게도 밀라노 스칼라 극장으로부터 즉시 작곡을 위촉받게 되어 최초의 오페라 산 보니파치오 백작 오베르토가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되었다(1839). 이 오페라가 그런대로 성공을 거두어 베르디는 스칼라 극장으로부터 또 다른 작품의 집필을 의뢰받는다. 그러나 그가 이 신작 가벼운 희극에 전념하고 있을 때 두 아이에 이어서 젊은 아내까지 잃고 만다. 이 하루만의 임금님, 또는 거짓 스타니슬라오(1840)는 밀라노에서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후에 밀라노 이외의 장소에서 몇 차례 성공을 거두게 된다. 가수 주제피나 스트레포니 (Giuseppina Strepponi)(1859년, 베르디는 그녀와 결혼함으로써 오래 지속된 애인 관계를 합법적인 관 계로 바꾸었다)를 비롯한 몇 친구의 끈기 있는 격려로 베르디는 이 시련을 이겨내고 역시 스칼라 극장에서 나부코도노조르(통칭 나부코)를 상연했다(1842). 이 작품은 대성공을 거두게 되는데, 그것은 민중의 예술의 탄생을 알리는 성악 어법의 격렬함과 민중을 상징하는 합창을 대폭적으로 도입(롯시니의 모세의 영향이 분명하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또한 이 성공은 작품의 주제가 애국심에 호소한 결과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당시 롬바르디아 사람들은 오스트리아의 압제 하에 놓여 있었다. 롬바르디(제1차 십자군의 롬바르디아인)(1843)는 역사를 제재로 한 대오페라라는 서사시적인 감흥 에서 착상을 얻은 작품이다. 그러나 베르디가 라틴적 낭만주의 특유의 사정에 어울리는 그의 극적 재능을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위고 (Victor Hugo) 원작의 에르나니(1844 베네치아)에 의해서였다(이룰 수 없는 사랑, 마지막 장면에서의 주인공의 희생적인 행위, 정치적 또는 인간적 배경 등). 한편, 그는 줄거리를 최대한으로 압축하여 성악에 거의 부동의 지상권(至上權)을 부여하는 타입의 오페라라는 음악적 도식을 중시했다. 이때부터 유명해진 베르디는 원하지 않더라도 1년에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오페라를 이탈리아에 있는 대극장을 위해 작곡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외국에서도 주문이 들어왔다. 1847년 런던에서 군도를(주연은 예니 린드), 파리에서는 예루살렘을 초연했다(주연 뒤프레). 갈레선(船)의 죄수처럼 일한 이 기간에 베르디의 작품은 대성공을 거두기도 했지만 실패도 적지 않았다. 작품 자체에도 하자가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성공 여부를 가름한 것은 연주자들의 수준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베르디의 새롭고 힘찬 음악에 대한 준비가 부족했고 또 반드시 검토해서 선정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젊은 베르디가 작곡한 이 작품들은 최근에 와서 객관적 판단 기준에 따라 재평가되었으며 잔 다르크, 두 사람의 포스카리, 아틸라,해적 같은 작품의 유례없는 아름다움이 밝혀졌다. 이 오페라에서는 오케스트라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또 주제 선택의 대부분은 정치적 뉘앙스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1847년의 맥베드는 베르디의 극음악 발전과정의 한 전환점이 되었고 이것은 1849년의 실러의 시 루이자 밀러에서 더욱 분명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디가 이탈리아와 전 세계의 작곡가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곡가로 평가받게 된 것은 1851년의 리골레토, 1853년의 일 트로바토레, 그리고 라 트라비아타(이 세 작품은 인기 3부작이라고 불린다)에 의해서이다. 경제적으로 보장받은 베르디는 이때부터 작곡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게 되었다. 주제의 선택에도 더욱 세심할 수 있었고 대본의 작성도 엄격하게 논의해서 만들도록 했으나 무엇보다도 자신의 오페라를 직접 지휘할 수 있게 되었다. 초연 때 실패한 라 트라비아타는 다음 해에 대성공을 거두었다. 1855년 제1회 만국박람회가 열렸을 때 그는 파리 오페라 극장을 위해 신작을 작곡하도록 의뢰를 받았다(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 그러나 베르디는 1857년 베네치아에서 시몬 보카네그라가 실패한 것은 심리적 깊이가 가창보다 앞서는 오페라를 청중들이 아직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시기에 그가 이전에 작곡했던 정치적 작품은 그 존재 이유를 이미 상실해 버렸다.

가면무도회 (Un ballo in maschera)가 로마에서 대성공을 거두었을 때 베르디는 부세토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리소르지멘토의 영웅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토리노에서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를 배알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베르디의 이름의 각 글자 V. E. R. D. I.는 이탈리아왕 비토리오 엠마누엘레(Vittorio Emmanele Re d'Italia)의 단축형이었다). 그는 그 후 다시 작곡활동을 시작했으며 1862년에는 운명의 힘을 페테스부르크에서 초연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그의 작곡 리듬은 눈에 띄게 더디어졌다. 1865년에 맥베드를 개정한 뒤 베르디는 파리 오페라 극장을 위해서 프랑스어로 오페라 돈 카를로스(1867)를 작곡하여 이탈리아어판으로 런던과 이탈리아에서 상연함으로써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1871년 카이로에서 초연한 아이다는 전대미문의 호화로움(일찍이 없었던 고액의 보수로)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계적 영광을 얻었다. 만초니(Manzoni)의 추도를 위해 작곡한 웅대한 레퀴엠의 발표 후 이탈리아의 새로운 세대의 음악들로부터 타도해야 할 사람으로 지목된 베르디는 일찍이 적대자였던 아리고 보이토와 화해했다. 시인인 보이토의 협력으로 시몬 보카네그라의 개정판(1881)의 공연이 대성공을 거두자 그는 다시 보이토에게 오텔로(1887)와 팔스타프(1893)의 집필을 의뢰했다. 이 두 오페라에는 놀랄 만한 젊음이 고동치고 있어서 80대에 이른 베르디의 혁신에 대한 노력이 엿보인다. 주제피나 스트레포니가 죽은(1897) 뒤 1898년에 베르디는 4개의 성가의 작곡을 끝냈다. 유산 상속인이 없던 그는 밀라노에 음악가들을 위한 휴식의 집을 세웠다.

1901년 1월 27일 밀라노에서 숨을 거둔 베르디는 그의 희망에 따라 검소한 장례로 치루어졌고 2월 27일 이 휴식의 집으로 옮겨졌다. 이 의식은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이끄는 900명 가까운 음악가들에 의해 엄숙하게 치루어졌다. 젊었을 때의 실의와 가족들의 죽음을 제외한다면 이 음악가의 인생에는 흥미를 자아내는 일은 아무 것도 없지만 60년에 걸친 작곡가로서의 그의 생애는 음악사에 그 전례가 없을 정도로 발전적인 곡선을 그리고 있다. 초기의 작품은 오스트리아의 치하에 있으면서 벨칸토의 마지막 타다 남은 불에 이끌리면서 롬바르디아의 귀족적인 분위기 속에서 초연되었으나, 여기에 반하여 그의 만년의 작품들은 드레퓌스 사건과 영화, 그리고 레코드의 발명 후에 나타났다. 이 시대에는 무소르그스키, 말러, 드뷔시 같은 작곡가들이 음악 서법의 법칙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았고 베리스모가 이탈리아 연극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벨칸토는 더욱 영웅적이고 낭창적 가창에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메르카단테를 서툴게 흉내낸 베르디의 초기의 오페라를 잊고 성가의 숭고한 묵상과 팔스타프의 유례없는 혁신을 별도로 하더라도, 이 틀림없는 발전이 베르디를 나부코에서 오텔로로 인도한 것이다. 즉 연기를 하지 않은 합창, 3개로 나누어진 어마어마한 아리아(레치타티보 아리아 카발레타), 극단적인 기교, 그리고 맹렬한 힘 등 흩어진 구조의 연극에서 작품 전체를 틈이 없는 흐름으로 만든다는 방법에 따라 대략적으로 구상한 보다 낭창적이고 완전한 오페라에 이르렀다. 여기서 그의 화성은 프랑스와 독일의 규범 위에 주조된 보다 독창적인 것으로 되어 있는데 스트라빈스키가 말한 것처럼 초기의 민중적 베르디에 비교한다면 일보 후퇴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베르디의 개성과 힘은 똑같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베르디가 주는 위대함이라는 감각은 나부코, 아틸라, 에르나니, 해적 등 애국적 가락과 해방된 모음성(母音性), 또 아이다, 오텔로의 섬세한 조탁(彫琢)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위대함은 베르디가 전통적인 오페라를 포기하고 노래에 의한 연극(drame lyrique)에 몸을 의탁한 데서 유래된 것은 아니다(이것은 당시 유럽에서 널리 볼 수 있는 현상으로 20세기에 와서야 그 타당성이 논의되고 있다). 또 베르디의 위대함은 대본의 질에 의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보이토의 시구가 베르디 초기의 협력자들인 피아베(Piave), 캄마라노(Cammarano)의 시구보다도 효과적이었다고는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쉴러, 셰익스피어, 구티에레즈, 위고 등의 영감을 추구한 것은 무엇보다 힘찬 장면을 바라던 음악가로서는 더욱 중요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장면에서는 낭만주의의 비이성적 성격이 모든 것을 용납하고 정치조차도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극적 효과의 탐구를 열심히 한 결과 이탈리아 오페라의 본질적 기반인 가창을 전혀 손상시키지 않을 수는 없었다. 벨칸토가 요구하는 것을, 인물의 성격 부여에서 격렬함과 영웅주의에 대한 배려에 따르려고 한 베르디는(인물의 성격 부여라는 영역에서 베르디는 모짜르트 이외에는 스승이 없었다) 서서히 콜로라투라를 단념해야만 했다. 베르디의 콜로라투라는 일찍이 베르디가 전대미문의 힘찬 효과를 요구했던 가수들조차도 다루지 못했고 종종 오케스트라가 노래의 선율을 유니즌으로 겹치게 함으로써 윤기있게 했으나 이것은 스폰티니나 베버가 위험하게까지 사용했다.

음성의 영역에서 베르디는 그보다 조금 앞선 벨리니와 도니제티에 의해서 높여진 음성의 영역을 조금씩 내리는 동시에, 보다 극적인 음성에 고음역과 같은 유연함, 비극적 상냥함의 효과, 고도의 뉘앙스를 요구함으로써 양립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도록 시도했다고 할 수 있다. 줄거리에서 베르디의 효과는 무엇보다 대본의 간결함, 인간의 내면심리(리골레토, 라 트라비아타, 그리고 특히 돈 카를로스)나 사랑과 우정(가면무도회, 돈 카를로스) 또는 정치의 테마가 들어가는 갈등의 창조에 있었다. 보카네그라와 피에스코의 대립, 펠리페 2세와 종교재판소장의 대립은 모든 시대의 위대한 연극상의 성공적 사례로 손꼽힌다. 등장인물에 대한 이러한 집중이 리골레토 이후 베르디에게 오케스트라의 역할을 축소시켰다. 오케스트라가 라이트모티브를 받쳐준다는(바그너의 실험 이전에) 보다 본질적인 간결한 효과를 가진 역할을 부여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이 효과는 인기 3부작에서 돈 카를로스에 이르는 걸작에서 특히 현저하게 찾아볼 수가 있다. 이들 작품은 정열의 고양과 풍부하고 넘칠 만큼의 서정의 완전한 융화에 달한 낭만주의 연극의 도달점이다.

주요작품

오페라
  • 산 보니파치오 백작 오베르토 Obert, conte di San Bonifacio(1839 밀라노)
  • 하루만의 임금님, 또는 거짓 스타니슬라오 Un giorno di regno, ossia il finto Stanislao(1840 밀라노)
  • 나부코도노조르 Nabucodonosor[통칭 나부코 Nabucco](1842 밀라노)
  • 제1차 십자군의 롬바르디아인 I Lombardi alla prima Crociata(1843 밀라노)
  • 에르나니 Ernani(1844 베네치아)
  • 두 사람의 포스카리 I Due Foscari(1844 로마)
  • 조반나 다르코(잔 다르크) Giovanna d'Arco(1845 밀라노)
  • 알치라 Alzira(1845 나폴리)
  • 아틸라 Attila(1846 베네치아)
  • 맥베드 Macbeth(1847 피렌체 개정판 1865 파리)
  • 군도 I Masnadieri(1847 런던)
  • 예루살렘 Jérusalem[롬바르디의 개작](1847 파리)
  • 해적 Il Corsaro(1848 트리에스테)
  • 레냐노의 싸움 La Battaglia di Legnano(1849 로마)
  • 루이자 밀러 Luisa Miller(1849 나폴리)
  • 스티펠리오 Stiffelio(1850 트리에스테)
  • 리골레토 Rigoletto(1851 베네치아)
  • 일트로바토레 Il Trovatore(1853 로마)
  • 라 트라비아타 La Traviata(1853 베네치아)
  •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 Les Vepres siciliennes(1855 파리)
  • 시몬 보카네그라 Simon Boccanegra(1857 베네치아, 개정판 1881 밀라노)
  • 운명의 힘 La Forza del destino(1862 페테스부르크)
  • 돈 카를로스 Don Carlos(1867 파리)
  • 아이다 Aida(1871 카이로)
  • 오텔로 Otello(1887 밀라노)
  • 팔스타프 Falstaff(1893 밀라노)
종교음악
  • 레퀴엠 Messa da requiem[만조니를 추도하기 위하여](1874 밀라노)
  • 주기도 Pater noster(1880) ▶아베 마리아 Ave Maria(1880)
  • 피에타 시뇨르 Pieta Signor(1894)
  • 4개의 성가 Quattro pezzi sacri아베 마리아 Ave Maria su una scala enigmatica(1889), 스타바트 마테르 Stabat Mater(1897),
  • 테 데움 Te Deum(1896), 성모 마리아의 찬가 Laudi alla Vergine Maria(1898)
실내악곡
  • 현악4중주곡 e단조(1873 나폴리)
성악곡
칸타타
  • 나팔을 불어라! Suona la tromba(1848)
  • 국민찬가 Inno delle nazioni(1862 런던)
가곡
  • 6개의 로망스(1838)
  • 17개의 가곡(1839, 1845, 1847, 1869)
  • 음성과 피아노를 위한 다른 많은 로망스와 미간행(未刊行)의 많은 기악 및 성악곡(182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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