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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읽기의 매력과 머스트 리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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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harvard 댓글 0건 조회 2,732회 작성일 11-05-16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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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상식의 범주를 벗어난 도전
괴테의 <파우스트>는 그 분량만 1000페이지가 넘는다. <삼국지>와 <서유기>는 짧게는 예닐곱 권, 길게는 열 권 넘는 시리즈로 구성되며, 단테의 <신곡>은 본문보다 딸린 주석이 더 많다. 낯선 시대 배경, 좀처럼 몰입하기 힘든 문장…. 고전을 펼쳐 들자마자 마치 쓰디쓴 약을 삼키듯 고통이 밀려온다. 두세 살 차이에도 대화의 단절이 느껴지는 시대에 몇 백 년 전 작품을 쉽게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아닌가? “고전이란 누구나 꼭 읽어야 할 책이라고 말하지만, 실은 아무도 읽고 싶어 하지 않은 책”이라던 마크 트웨인의 말에 가슴 한구석이 후련해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하지만 고전을 단 한 권이라도 읽어본 이라면 다르게 반응한다. 몇 배의 인내를 필요로 할지언정 책장을 덮었을 때 그들의 얼굴에는 충만감이 넘친다. <변신 이야기>에서 그리스・로마 신화를, <돈키호테>에서 모험과 도전이라는 인간의 본성을, 다윈의 <진화론>에서 인류의 조상을 만나고 온 이들은 이전보다 한층 성숙해 있다. 시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알을 깨고 새로운 세상과 마주한 듯한 기분이다. 고전 속 인물들을 통해 지금 처한 고민의 답을 찾고, 때로는 위로를 받기도 한다. 당장은 실질적인 도움을 받을 수 없다 해도 살아갈 나날 속에 은연중 에 도움이 될 든든한 자양분이 쌓인다. 고전古典 읽기란 결코 고전苦戰이 아닌, 즐겁고 행복한 행위인 것이다.
그럼에도 어디서부터 무엇을 읽어야 할지 혼란스러울 것이다. 고전과 소통하는 법, 과거와 현재의 접점을 찾아내는 것 또한 막연할 것이다. 스무 해 넘게 고전을 연구하고 그 안에서 인생의 답을 찾아온 고전평론가 고미숙, 그녀가 고전의 숲에서 즐거운 사색을 즐길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흔히 고전하면 고루하고 난해한 책이라고 생각하는데. 고전을 역사적으로만 접근하는 것은 잘못된 방법이다. 고려시대의 책도 고전이며, 동시대의 명저도 고전이 될 수 있다. 고전 속의 삶은 결코 지루하지 않다. <돈키호테>와 <임꺽정>은 얼마나 위트 넘치는 스토리인가? 시공간이 다르기 때문에 고전이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놀이동산처럼 입장권만 내면 언제든 즐길 수 있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하면 그보다 몇 배의 교훈을 얻을 수 있는데, 그 정도도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고전이 어렵다는 말은 결국 고전을 읽지 않은 이들이 만든 핑계다.
하루에도 수십 권의 신간이 쏟아지는 시대, 우리는 왜 고전을 읽어야 하는가. 본연의 생각을 확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라는 복잡한 매트릭스의 세계에서 새로운 시공간의 출구를 찾아주는 것이 바로 고전이다. 사유의 지도를 다시 그리게 하고, 그 지도는 우리의 일상을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
고전만큼 정의 내리기 어려운 것도 없다. 한마디로 정의해달라. ‘시공간을 초월해 보편타당한 지혜와 위트를 담은 텍스트!’상식의 범주 안에 든 서적은 고전이 아니다. 수천, 수만 부가 팔렸어도 6개월도 지나지 않아 기억 속에 사라지는 책이 얼마나 많은가? 그것들은 우리를 단지 ‘여기’에 머무르게 하는 데 그친다. 이미 내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이해하고 감동하는 것은 고전이 아니다. 흔히 물질 다음으로 정신을 얻는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탐욕이다. 온몸이 화려하게 빛나도 내적으로 풍요롭지 못하면 결국 공허함을 느끼지 않는가? 물질과 정신의 앎을 통한 ‘시공간의 자유’를 확보할 때라야 진정 럭셔리한 삶이라 할 수 있다. 고전 한 권은 평생을 간다. 인생의 질곡에 부딪힐 때마다 일상의 나를 정화하는 힘이 된다.
고전 리스트가 워낙 방대하다 보니 좀처럼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고전에 관심을 갖는 독자에게 작품을 어떻게 선정하고 접근해야 할지 알려달라. 좌충우돌 여러 책을 만나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그 세계’로 풍덩 빠져드는 때가 온다. 고전을 읽을 때는 항상 내가 살고 있는 ‘현재’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우선 지금 여기의 삶, 이곳의 출구를 위해 어떤 고전을 만나야 하는지 자문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 여행의 길목에서 만나는 스승이 고전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삶의 멘토다. 성경이나 법전을 두렵다고 밀어낼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읽고 또 읽어라. 나는 수차례 같은 책을 반복해 읽는데, 한두 번 읽어서는 고전 속에 담긴 깊은 뜻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동양에서는 전통적으로 구술과 낭송을 통해 고전을 체득했다. 중요한 구절은 메모해 시간이 날 때마다 읽어도 좋고, 줄거리 등을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설명하는 것도 좋다. 그 정도가 되어야 고전을 완전히 ‘읽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언젠가는 반드시 그 세계로 들어가겠다’는 생각으로 평생 고전을 대하라. 그 꾸준한 관심만이 고전에서 해답을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고전이 어렵다고 겁내거나 거부해서는 안 된다.

고전과 소통하게 된 본인의 경험을 보다 자세히 말해달라. 박사 논문을 쓸 때까지 고전과 나 사이에는 괴리감이 존재했다. 고전을 학문의 도구로서 학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동체 스터디를 통해 <열하일기>를 만난 뒤 시공간이 열리기 시작했다. <열하일기>에 현시대의 고민을 넣으니 무엇이든 과거에 반추해 답이 나오더라. 그를 통해 고전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길이자 최고의 근거이며, 스승이자 벗임을 알게 되었다. <열하일기>의 매력은 각기 다른 문체를 사용하는 놀라운 변주에 있다. 마치 교향곡이나 소나타처럼 모든 형식의 악곡이 등장한다. 길 위에서 떠돈다는 쉽지 않은 설정 아래 그 정도의 변주를 내는 작가는 거의 없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훌륭한 고전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이다.
고전의 기호도 시대에 따라 달리 해석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과거와 현재, 미래는 일직선상에 놓인 관계가 아니다. 곡선처럼 매순간 유기적으로 얽혀 있다. 고전을 통해 단순히 과거를 들춰보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고전을 선별해 답을 찾아야 한다. 예를 들어, 지난 20세기에는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읽었다면, 21세기가 필요로 하는 고전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다. 지금 시점에서 정약용의 책은 현재와 접속이 안 된다. 커뮤니케이션이 단절된 시대, 스스로가 누군지 모른 채 부평초처럼 삶을 흘려보내는 요즘 시대에 <목민심서>는 지나치게 교과서적이며 학문적이다. 그보다는 길 위에서 삶을 논하는 조선시대 노매드 박지원의 가르침이 지금 우리에게 더 적확할 것이다. 1980년대에는 신동엽이나 이수영의 시처럼 혁명의 문제를 다룬 고전이 널리 읽혔지만, 지금 시대에는 잘 읽히지 않는 것 또한 그런 이유다.
서양 고전과 동양 고전은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결국 ‘위트’의 문제다. 우리 고전은 대부분 해피 엔딩을 추구한다. 흔히 한의 정서가 녹아 있다고 하는데, <춘향전>이나 <수궁가> 할 것 없이 한바탕 축제 아닌 것이 어디 있는가? 반드시 주인공은 눈이 멀고,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비장함은 20세기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잘못 들어온 것이다. 서양에서는 낭만주의 시대 이후 천재의 삶은 반드시 비장하고 슬퍼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이 존재했다. 그리스극은 물론 셰익스피어의 작품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서양 고전이 웅장하고 비극적인 스토리를 강조하는 데 반해, 동양 고전은 해탈의 경지, 즉 완벽한 대자유를 말한다. 공자가 집필한 어떤 책을 보더라도 비극이 강조되지 않는다. 장수를 통해 결국 모두가 오래 산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이 어떻게 비극이 되겠는가? 비극적이고 무거운 것만이 진리라는 서양 고전만을 칭송하는 관념은 버릴 필요가 있다. 하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구 어디든 더 뛰어난 텍스트가 있다면 그것은 언제고 답이다. 고전은 인류 공통의 자산이기 때문에 국수주의는 어울리지 않는다. 서양이든 동양이든, 고전은 국가와 시대를 막론하고 널리 읽히는 책인 만큼 끊임없이 읽고 또 읽어야 한다.

고전의 숲으로 떠나고 싶은 이들을 위한 추천!
<임꺽정> 벽초 홍명희 총 10권짜리 소설을 통해 조선시대 길 위에서 펼쳐지는 칠 두령의 사랑과 우정, 자유와 열정, 그리고 반역과 투쟁의 여정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오늘날 임꺽정과 그의 친구들은 백수와 비정규직, 영혼 없이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길 위도 얼마든지 ‘자유롭고 새로운 공간’이 될 수 있다고 당당하게 외친다.
<돈키호테> 미겔 데 세르반테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들이 죽기 전에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꼽은 스페인 문학의 정수. 사실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지만, <돈키호테>를 제대로 완독한 이는 거의 드물다. 책을 통해 풍자와 해학을 구사하기 위해 치밀하게 노력한 작가의 숨은 전략을 엿볼 수 있다.

성경 다음으로 미국인을 울린 작품, <앵무새 죽이기>
미국대사관 공보참사관 패트릭 리네한 미국의 역사는 불과 230여 년에 지나지 않는다. 유럽과 아시아 국가에 비해 역사가 짧다 보니 상대적으로 고전이 적지 않을까? 하지만 패트릭 리네한Patrick J. Linehan 공보참사관이 건넨 리스트는 그것이 한갓 기우임을 증명한다. 대학에서 러시아어를 전공한 이 근사한 문학도는 20개에 달하는 고전 리스트를 건네주었는데, 하루아침에 이주 노동자로 몰락한 주인공의 시련을 다룬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흰 고래에 다리를 잃은 선장의 복수가 담긴 허먼 멜빌의 <모비 딕> 등 주로 20세기를 수놓은 명작들이다. “흔히 미국의 고전이라고 하면 호손과 헤밍웨이, 펄 벅이나 트웨인 등 19세기 작가의 작품을 꼽지만, 사실 미국 문학이 가장 화려하게 꽃핀 시기는 20세기”라는 것이 그의 설명. 비단 미국 작가의 작품을 떠나 영어로 쓰인 작품이라면 모두 미국 고전의 범주에 들 수 있다고 말한다. 역시나 미국인 특유의 자유롭고 열린 사고다.
그 가운데 최고로 꼽는 작품은 1960년 발표한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 백인 여자를 성폭행했다는 누명을 쓴 흑인과 그를 변호하는 백인 변호사의 감동적인 드라마는 국내에서도 서점가의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을 만큼 인기가 많았다. 긴 세월 동안 사랑받아온 명작 대신 불과 50년 전의 ‘최신 고전’을 꼽은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상 미국이 노예제도를 기반으로 번영한 국가라는 점에서 인종차별은 늘 안고 가야 하는 문제다. 작가는 여섯 살짜리 소녀의 시선을 빌어 그 문제가 오늘날 여전히 존재함을 날카롭게, 그러나 감동적으로 그린다.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한 사실이 여전히 우리에게 충격적인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미국인에게 있어 <앵무새 죽이기>만큼 훌륭한 정치적 메시지와 문학성을 다룬 작품도 없다.” 실제로 <앵무새 죽이기>는 1991년 미국 국회도서관의 조사 결과 ‘성경 다음으로 미국 독자의 마음을 바꾼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더불어 세계 40여 개 언어로 번역되었을 만큼 보편적 가치를 담은 고전이라 할 수 있다.
인권 문제 못지않게 미국 문학의 또 다른 축을 이루는 것이 ‘개척과 모험 정신’이다. 고전을 통해 스펙터클하고 흥미진진한 여행을 떠나고 싶은 이를 위해 패트릭 리네한은 다음의 고전 리스트를 덧붙인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을 땐 미시시피 강을 여행하는 소년이 되고, <모비 딕>을 읽을 땐 태평양을 항해하는 포경선의 선원이 될 수 있다. 미국 남부의 전원생활을 만끽하고 싶을 땐 유도라 웰티의 작품을 읽으면 된다. 이처럼 고전은 언제든 시간 여행을 떠날 수 있는 타임캡슐과 같다. 그것은 내 사고를 확장해 끊임없이 상상하게 만들고, 나를 종전보다 더 성숙한 인간으로 만든다. 고전이 주는 매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

17세기 격동의 시대를 담은 민중 고전, <레 미제라블> 프랑스문화원 원장 로르 쿠드레 로 몇 해가 멀다 하고 이 대륙에서 저 대륙으로 옮겨 다니는 외교관에게 이삿짐은 간소해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프랑스문화원 원장 로르 쿠드레 로Laure Coudret Laut가 짐을 꾸릴 때 가장 먼저 챙기는 것은 책이다.
그녀는 양손 가득 자신의 서재에서 고른 7개의 작품을 들고 등장했다. 극작가 몰리에르의 <위선자 타르튀프>, 여성 작가 마리 마들렌 라파예트의 <클레브 공작 부인>, 작가이자 사상가이기도 한 장 폴 사르트르의 <말> 등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 종류도 참 다양하다. 그녀가 개인적으로 즐겨 읽는 고전은 프로방스가 배경인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시골 의사 보바리의 부인이 시골 귀족 로돌프와 간통 끝에 파국을 맞는다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이야기다. “<보바리 부인>은 프랑스 낭만주의 시대에 등장했지만, 다양한 유형의 ‘보바리 부인’이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점에서 시대를 아우르는 고전이라 할 만하다”고 로르 쿠드레 로는 말한다. 그녀가 아끼는 프랑스판 <보바리 부인>에는 풍성한 크리놀린을 차려입은 보바리 부인의 삽화가 있어 보는 즐거움을 더한다.
하지만 그녀가 무엇보다 프랑스 고전의 정수로 꼽는 것은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이다. 우리에게는 빵 한 조각을 훔쳤다는 이유로 19년간 형벌을 받은 ‘장 발장’으로 더 잘 알려진 작품. “19세기 중반, 프랑스의 격변과 혼란에 가득 찬 시대상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최고의 고전으로 손색이 없다. 굶주림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유일한 관심이던 장 발장이 서서히 사회에 눈뜨며 진정한 자유를 얻는 과정이 남성적 필체와 웅장한 서사에 담긴 대작이다.” 그녀의 말처럼 프랑스인은 <파리의 노트르담>, <레 미제라블> 등을 집필한 위고와 평생을 함께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스로 “짐이 곧 국가다”라고 말한 태양왕 루이 14세에 반해, 위고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문학의 태양왕’이라는 칭호를 붙일 만큼 프랑스 고전을 얘기하는 데 절대적인 인물이다. 더불어 “고전은 서사를 갖춘 문학 작품이라고만 생각하는데, 에세이를 통해서도 프랑스 고전을 느낄 수 있다”며, 장 폴 사르트르의 <말>이나 시몬 드 보부아르의 <처녀시대>, <제2의 성>과 같은 작품을 한번쯤 읽어보길 권한다. 스토리가 아닌 작가의 철학을 담은 에세이는 프랑스 고전을 이루는 또 다른 축이다.
그녀에게 고전은 전혀 다른 시대를 연결해주는 열쇠다. 그 열쇠는 가족 구성원과의 소통도 돕는다. “위고나 발자크는 나와 올해 열여섯 살이 된 딸과 이어주며, 작가인 남편과는 고전을 놓고 서로의 감상을 공유하게 해준다. 세상에서 이처럼 다재다능한 소통의 도구가 또 있을까?”

평생을 바쳐 완성한 괴테의 역작, <파우스트> 독일문화원 원장 라이문트 뵈르데만 칸트, 헤겔, 하이데거 등 저명한 철학자를 배출한 독일은 신인문주의의 발상지라 할 만큼 인류의 사유를 확장하는 데 어느 나라보다 공헌해왔다. 한국 여성 3명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지만, ‘독일인 3명이 모이면 토론을 나눈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독일은 수준 높은 철학을 꽃피운 곳이 아닌가! 그렇다 보니 독일 고전에는 깊은 철학적 사유를 근간으로 한 작품이 주를 이룬다.
예술 도시 드레스덴에서 온 라이문트 뵈르데만Raimund Wordemann은 간단한 질문에도 즉흥적으로 답하는 법이 없다. 질문은 던지면 빨간 수첩에 꼼꼼히 메모한 뒤 답변은 며칠 뒤에 주겠다는 식이다. 그토록 사려 깊은 독일문화원 원장이 추천한 고전 리스트는 총 16편. 그중에는 독일의 대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와 극작가 피터 한트케, 데오도르 폰타네의 대표작이 주를 이룬다. 흥미로운 점은 일반에 널리 알려진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빠졌다는 것. “개인적으로 고전이란 인류에게 이로운 영향을 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명작임에도 독일 내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많은 젊은이들이 주인공을 따라 자살했으며 알코올중독에 시달리는 등 사회적으로 문제가 많았다. 그보다는 더 유익한 독일 고전이 많기 때문에 굳이 목록에 넣지 않았다.”
그가 추천한 독일 최고의 고전은 역시 괴테의 <파우스트>. 그러고 보니 누구나 독일 하면 괴테를 떠올리고, 괴테 하면 그가 평생을 바쳐 집필한 <파우스트>를 생각하는 듯하다. 그는 “노학자 파우스트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에 빠져 현세의 쾌락을 좇다 천상의 구원을 받는 이야기는 서사의 방대함이 독자를 압도한다.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빌헬름 마이스터 방랑 시대> 등 다른 훌륭한 작품도 많지만, 그가 60년간 집필한 <파우스트>야 말로 독일 문학의 정수다”라며, 더불어 ‘최근 쓰인’ 고전을 읽고 싶은 이들에게는 전통극의 규범을 깨고 새로운 연극 문법을 개척한 피터 한트케의 작품을 권한다. “관객에게 욕설을 퍼붓고 객석을 향한 물세례도 불사하는 연극 <관객 모독>을 잘 알 것이다. 피터 한트케는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작품을 통해 끊임없이 대중과 소통하는 독일 최고의 현대 작가다.”
라이문트 뵈르데만에게 고전은 세상에서 가장 평온한 여행을 선물한다. 책을 펼치는 순간 마치 고요한 섬에 머무르는 기분이라고. “고전을 통해 나에게 질문하고, 답을 찾으며, 그 과정에서 세계관을 확장하는 일만큼 마음이 평온해지는 일은 없다.”


세계 최고의 명품 로맨스, <에마>
주한영국문화원 원장 이언 심 ‘인도를 준다 한들 셰익스피어와는 바꾸지 않겠다’던 영국인데, 추천 고전 가운데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단 한 권도 언급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 그에 대한 영국 신사 이언 심Ian Simm의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물론 셰익스피어는 영국 고전의 아버지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읽는 문학’이 아니라 ‘듣는 문학’이다. 도서관 책상이 아닌, 글로브 시어터 같은 무대 위에서 감상해야 한다.”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를 뒤로하고 그가 추천한 고전은 총 5권. 제인 오스틴의 <에마>, 윌리엄 메이크피스 새커리의 <베니티 페어>, 조지 엘리엇의 <미들마치>, 찰스 디킨스의 <황폐한 집>, 그리고 토머스 하디의 <성난 군중으로부터 멀리>다. 17~19세기에 출간한 것들로, 작가의 대표작과는 거리가 먼 작품들이다. “다수가 찾는 고전도 매력적이지만, 대가의 숨은 고전을 통해 보다 깊은 사유를 즐길 수 있다. 예를 들어 찰스 디킨스의 대표작으로 <올리버 트위스트>를 꼽지만, 빈곤층의 아픔을 그린 <황폐한 집>이야말로 사회 각층을 폭넓게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갖게 한다.”
그가 이처럼 누구나 추천하는 뻔한 책이 아닌 새로운 고전을 제시할 수 있는 이유는 늘 고전을 가까이 두고 즐기는 독서 습관 덕분이다. 이언 심은 서사와 문장의 멋을 찬찬히 음미하기 위해 같은 책이라도 수십 차례 읽는다. 옥스퍼드 대학 공학도 출신답게 마치 어려운 문제를 풀 듯, 더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이야기일수록 좋아한다고. 그중에서도 담담한 필치로 인생의 즐거움을 재치 있게 표현한 제인 오스틴의 작품을 꼽는데, 특히 시골 작은 마을의 21세 아가씨가 온 동네 처녀총각의 중매를 자처하는 <에마>는 울적할 때마다 즐겨 본다. “귀족 문화에서 꽃핀 영국 고전의 매력은 엄숙함을 비트는 ‘유머’와 ‘위트’에 있다. 겉으로는 남녀의 애정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그 안에는 여성의 사회적 위치와 고민 등이 매우 치밀하고 구체적으로 그려진다. 인물의 감정을 복잡하고 입체적으로 표현한 <에마>만 한 로맨스 고전은 없다.” 그의 설명처럼 <에마>는 작품을 출간한 당시에는 세속적이고 깊이가 없다고 비판을 받았으나, 제인 오스틴 사후에 재평가를 받으며 현재 영미 문학의 수작으로 꼽힌다. 이는 고전이 한 시대에 머물지 않고, 오랜 시간 꾸준히 사랑받고 평가되는 것임을 시사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고전이란 같은 소재를 갖고 서로 다른 층위를 내는 것”이라고 정의 내린다. 더불어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와 도리스 레싱의 <런던 스케치>는 서로 다른 런던을 그린다. 만일, 어떠한 고민이 있다면 그와 유사한 상황을 풀어낸 작품들을 모아 서로 비교하며 읽어보라.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조언을 더한다.


중국 4대 명작을 뛰어넘는 국민 소설, <홍루몽>
중국문화원 원장 처자오허
중국은 지리적으로 우리와 워낙 가까운 나라다 보니 제목만 들어도 친숙한 고전이 많다. 중국의 4대 명작이라 불리는 <삼국지연의>, <서유기>, <수호지>, <금병매>는 전권을 완독하지 않았더라도 간략한 내용쯤은 알고 있는 이가 많다. 특히 삼장 법사와 손오공 일행이 악귀를 물리치며 인도로 경전을 얻으러 떠나는 <서유기>, 유비의 충성과 공명의 지략이 담긴 <삼국지연의>는 조선시대에 들어온 이래 지금까지도 다양한 판본과 재해석을 통해 널리 사랑받는 작품이다.
하지만 중국문화원 원장 처자오허車兆和가 최고의 고전으로 꼽은 작품은 조설근의 <홍루몽紅樓夢>. 해석하자면 ‘붉은 누각의 꿈’이란 뜻인데, 주인공 가보옥과 임대옥을 둘러싼 비극적 사랑을 담은 18세기 최고의 러브 스토리다. 그가 중국의 4대 기서를 제치고 <홍루몽>을 최고의 고전으로 꼽는 이유는 무엇일까? “21세기 고전은 새롭게 정의 내릴 필요가 있다. 중국의 4대 기서는 이미 중국의 고전이라기보다 ‘세계인의 고전’이다.” 그의 설명처럼 <뉴욕 타임스>나 <뉴스위크> 등 세계적 언론 매체에서 선정한 고전 리스트에 중국의 4대 기서는 언제나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중국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공감을 얻는 인류의 고전이 된 것이다. “<홍루몽>은 4대 기서에 비해 상대적으로 해외에 덜 알려졌지만, 중국에서는 가장 널리 읽히는 ‘국민 고전’이다. 작품은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신남성 가보옥과 총명하지만 병약한 그의 사촌 여동생 임대옥의 사랑 이야기기 주축을 이룬다. 작가는 거창한 명분이나 이론을 설파하지 않고 삶의 허망함을 꿈에 빗대 이야기한다. 그 속에 중국의 사상과 풍속, 문화 등이 손에 잡힐 듯 세세하게 담겨 있다.” 베이징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그는 절도 있는 영국식 악센트로 <홍루몽>의 매력을 설명한다. 그의 말처럼 매년 베이징에서는 국제홍루몽학술대회를 열어 학자들 간에 열띤 토론을 벌이는가 하면, 중국인들은 고등학교 과정에서 <홍루몽>을 의무적으로 읽고 배운다. 중국 베이징 TV가 <홍루몽>을 드라마화하기 위해 연 오디션에는 4만여 명이 넘는 지원자가 몰려 오디션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홍루몽>은 대부분의 중국 고전이 그러하듯 수천 페이지에 달한다. 가장 최근 완역된 나남출판사의 <홍루몽>만 해도 6권이다. 그보다는 호흡이 짧은 중국 고전을 묻자 루쉰의 작품을 추천한다. “<아Q정전>은 강자에게 굽신거리며 약자 앞에서 으스대는 주인공 아Q를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그런 면에서 1920년대에 나온 작품이지만, 여전히 현대와 소통한다는 점에서 고전이라 불릴 만하다. 우리는 고전을 통해 정신의 풍요로움을 얻는다. 그것은 절대 돈으로 살 수 없는 ‘영혼의 럭셔리’다.”

천국과 지옥을 다룬 고전의 아버지, <신곡> 이탈리아문화원 원장 루초 이초 영국은 셰익스피어, 프랑스는 빅토르 위고, 독일은 괴테라는 공식처럼, 이탈리아 고전 하면 단테의 <신곡>이 떠오르는 것은 당연하다. 이탈리아문화원 원장 루초 이초Lucio Izzo 역시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추천 리스트 가장 윗부분에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을 적어 건넨다. 그러고는 당연한 결과 아니냐는 듯 씩 웃어 보인다. 서구 문학의 원형이 서사시에서 시작된 만큼 단테의 <신곡>은 매 세기 최고의 고전으로 꼽히기에 충분하다.
<신곡>을 읽을 때는 반드시 전문 사전이 있어야 한다. 주인공 단테가 일주일간 천국과 지옥을 오간 방대한 서사가 시라는 함축적인 형태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루초 잇초는 “<신곡>은 라틴어가 지배하던 시대에 이탈리아어로 쓴 작품이기 때문에 이탈리아인조차 항상 사전의 도움을 받는다. 과정은 수고스럽지만, 같은 단어에 담긴 과거와 현재의 전혀 다른 뜻을 찾아낼 때면 시공간의 장벽이 허물어지는 짜릿한 희열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가 가리킨 집무실 책장에는 <신곡>을 읽기 위한 수 권의 전용 사전이 빼곡히 꽂혀 있다. 원서를 읽을 수 없는 우리에게는 부산외대 박상진 교수가 번역한 민음사판 <신곡-단테 알리기에리의 코메디아>를 추천한다. 한국어를 읽을 순 없지만, 단테의 작품을 연구하는 국내 여러 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했을 때 가장 원문에 가깝다는 평을 받은 책이기 때문이란다. 원제목 가 <신곡>으로 잘못 번역된 그간의 오류를 바로잡고 <단테-알리기에리의 코메디아>로 수정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고.
루초 이초가 생각하는 고전이란 잘 빚은 ‘코냑’과 같은 것이다. 서서히 은근하게 취하는 술처럼, 알지 못하는 사이 우리의 삶을 느슨하고 즐겁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고전을 반드시 넘어야 할 정복의 대상으로 삼지 말라. 조금씩 잔에 덜어 그 맛을 음미하듯, 한 페이지든, 한 문장이든 충분한 호흡을 두고 읽어라. 머리가 아프면 잠시 덮어두었다가 생각을 정리한 뒤 또다시 펼쳐 읽어라. 좋은 코냑은 10년 뒤, 100년 뒤에 마셔도 좋지 않은가? 천국과 지옥을 넘나드는 <신곡>이야말로 최고의 타임머신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즐겨라.” 더불어 여전히 고전의 명확한 정의와 그 무한한 가치를 모르겠다면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읽어보길 권한다. “14세기,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벌어진 의문의 살인 사건을 좇아가다 보면 인류가 오랜 옛날부터 고전을 얼마나 동경하며 흥미롭게 읽었는지를 알 수 있다. 금서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수도사들의 열정은 고전의 치명적인 매력을 대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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