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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금 1달러 봉킴 맨손창업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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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Angel 댓글 0건 조회 849회 작성일 09-12-21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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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금  1달러로 시작한 봉킴 맨손창업도전기

물 맑고 산세좋은 웨스트버지니아에서 미국생활의 첫단추 경제학박사 학위를 무난히 취득했다. 이곳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하기 위한 베이스캠프가 안정되게 마련된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안주하고 싶지는 않았다.  

새로운 도전 두번째 단추를 끼우기 위하여 현대식 역마차 U-HAUL이삿짐트럭에 아내와 자식을 태우고 아팔라치안 산맥을 넘어 미동부 뉴욕으로 향했다.  때로는 기병대와도 싸워야하고 때론 아파치와도 싸워야 하는 360도 의지할곳 없는 국제도시 뉴욕을 향하여 적수공권으로 뛰어든 것 이었다.

미국이 탄생한 이후 각지에서 몰려온 이민자들은 누구나 맨손으로 꿈을 이룰수 있는 기회의 땅이 펼쳐진다는 것을 믿고 산다는 것이다.

옆동네 유명한 변호사 체이스씨도 빈책상 하나로 사무실 문을 열었고, 치과의사 죠지도 밴찌 하나만 있으면 먹고 산다고 늘 얘기한다. 내인생 내손으로 개척한다는 각오를 하며 누구나 꿈을 꾸고 있는중이다. 록펠러, 케네디, 버펫, 게이츠, 벤더빌트등 억만장자들도 원래 돈이 많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웃집 세탁소 김 아저씨, 네일가게 송 아줌마, 델리그로서리 박 선배, 쥬얼리 최사장등 평범한 서민들은 이들보다는 조금많은 창업자금을 가지고 시작했기에 행복한 출발을 한사람들이라 말할수 있다. 하지만 이당시 봉킴은 맨손 맨발로 뛰기로 작정하고나니 두려움따위는 사라지고 세상을 움켜쥐고자 힘찬 기를 발산하며 미래를향하여 진군할 따름이었다.       

뉴욕에서 국제 자원에너지그룹을 만들려고 5대양6대주에 퍼져있는 가까운 친구들과 휴먼 네트웍을 결성하고 가동을 하기위한 맨하탄 본부사무실을 구하는 중이었다. 신문을 뒤적거리던중 사무실 같이 쓰실분 구함 이라는 작은 광고를 보고 연락하여 평생의 은인 이광남 선생을 만난다. 이분은 봉킴주머니 사정을 간파했는지, 무엇을 하기위해 뉴욕 사무실이 필요한지 몇마디 묻더니만 책상, 전화, 집기등을 사무실을 무료로 빌려주겠다 한다. 돈이 벌리면 조금씩 사무실 경비를 쉐어하라며 나의 주머니 사정을 꿰뚫어 보는 분 같았다.  

말한마디에  맨하탄 중심 33가에 봉킴사무실을 얻은 행운 그러나 결과는 처절한 실패! 

머리속에서 맴돌던 자원에너지그룹 설립구상이 현실화되어 가동을 했으나 사업운영경비를 충당할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몇달 버틸수 있었던 실탄과 생활비마저 다 떨어진 것이다. 마치 봉킴의 첫번째 미국사업구상이 꿈속에서 나타났던 사막의 신기루같은 허상으로 변해버리고말았다. 머리속에는 수천만불 수억불이 왔다 갔다 하건만 내주머니 사정은 빈털털이 상태이다. 

이당시 뉴욕을 바라보는 나의 화두는 "궁즉통"이었다.

궁하면 통한다는 쾌를 본것이다. 말로는 궁하면 통한다는 것이지 현실적으로 아내와 자식이 배속이 꼬르륵하게 된다는 생각에 초창기 뉴욕 정착은 맨땅에 헤딩하기보다 더 힘든 싸움이었다. 무슨 일을 하든 가정의 생활안정을 유지하는것이 최우선이라는 미국생활의 기본원리를 뼈저리게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힘든 상황이 닥쳐오니 낮에는 맨하탄에서 밤에는 뉴저지에서 무슨일이든지 닥치는데로 일을 하여야만 생활비가 많이드는 뉴욕생활을 그나마 할수있었다. 밤이 낮이되고 낮이 밤이되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몸에있는 기름기가 다빠지고 은행의 잔고가 바닥이 나고있었다. 

눈물젖은 빵을 먹으며 미국에서 경제적 독립을 위하여 앞이 않보이는 창업의 안개속을 달리던 이런 여정도 젊은 나에겐 축복이였던것 같았다.

학식과 명예, 빽이 든든하고 한국에 금송아지가 있다해도 몸으로 부닥쳐보지 않고서는 미국생활의 감을 잡을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 정착단계에서 지불해야할 비싼 수업료를 내지 않은 이민자들, 온실속에서 겨울의 혹독한 강추위를 격지 않은 이민자들, 인생 후반기가 준비 않된 이민자들은 후회해도 소용없고  더욱 비참한 모습으로 고생하는 모습들이 주위에서 눈에 뜨였다.  삶의 도구로써 돈을 많이 벌어야 되는지에 대한 해답을 삶의 밑바닥에서 얻은 것이었다. 

미국생활의 촛점은 자신을 절대 자유속으로 넣는것이며 편안한 인생 후반기를 준비함에 있다는 실용적인 삶의 진실을 깨우치게된 계기가 된것도 이즈음이다.

생긴대로 살고, 솔직하게 살고, 생생하게 살고, 100% 자신이 원하는 참나로 사는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남을 바라보는 자신의 눈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깨달케된다. 사회에 성공한 사람, 유명한 사람에 집착하면서 세상의 진실을 보지못하고 있다. 사회의 사슬에 잡히지않고 온전한 자유인으로 자신만을 위한 맞춤라이프를 영위하는것이 미국생활의 매력임이 분명하다.  물론 인간세상 이후에는 신의 영역이기에 여기서 내가 말할 처지가 아님을 잘 알고있다. 

아무도 발견못하던 창업 아이디어의 새싹이 머리속에 움트고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봉킴이 초창기 정착했던 뉴저지 포트리 타운 소매업소를 이용할때면 동네가게주인들이 일본인들을 고객으로 확보하고 싶으니 일본인 주소록을 구해달라며 많은업소에서 부탁을 받곤했다. 이당시 포트리는 일본인 타운이었다. 모든 주재원들의 거주는 포트리를 중심으로 이루어 지고있기에 일본고객을 확보해야만 동네 업소들의 매상이 향상됨이 분명하였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창업을 한다면?

집에서 굴러 다니던 전화번호부책에서 일본인 이름 주소 전화번호를 나의 286 컴퓨터에 입력하여 메일링리스트를 팔면 돈이 된다는 고객정보판매 아이디어였다. 일본말은 모르지만 영문으로된 전화번호부에서 일본인 성씨를 쉽게 구별할수있었다. 밤낮없이 일본인 주소록입력을 마친후 몇몇 동네업소에 일본인 거주자 명단이 완성되었다고 연락을하니 여기저기서 주문을한다.

솔직히 주문은 받았으나 새프린터를 구매할 자금도 여의치가않다. 포트리 다운타운 이태리식당 주인 알프레도에게 선불을 요구하니 손쉽게 프린터 값이 생기는 것이었다. 밤새워 메일링 리스트가 찍힌 레이블을 만들어 여러 업소에 공급하니 일본인 거주자들도 믿을수있는 좋은업소 정보를 받아서 좋고, 동네업소도 일본고객 덕분에 매출이 늘어나는 선순환이  있었다. 일본마켓 전문가로 첫발을 내딛으며 광고회사의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또한 일본인 주부협회에서도 뉴저지거주 일본인 명단이 필요하니 일본 가정에대한 정보를 구매하겠노라고 연락이 오곤했다. 사업아이디어는 하늘에서 떨어지는것이 아니라 내주변 어디서나 굴러다니고 있다는것을 알아차린 순간부터 창업을 꿈꾸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열심히 코칭을 해주었다. 

한인이민자들도 뉴저지의 새로운 거주환경 매력에 끌려 인구가 불어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물론 한국계 지사로 나온 지사원 가족들은 비교적 치안이 안전하고 자녀들의 학군이 좋은 뉴저지를 선호하여 거의 주재원 대부분이 생활근거를 이지역에 마련했다. 한편 본사가 맨하탄에 있던 많은 한국계 무역회사들도 본사건물을 북부뉴저지로 옮기는 현상이 벌어진다. 이또한 한인 인구 밀집지역이 되고있다는 판단하에 한인인구 메일링리스트 제작을 시도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인 인구증가와 더불어 코리안 비지니스가 증가할 무렵 북부뉴저지 지역에 제2의 후러싱, 새로운 코리안 타운을 만들자는 몇몇 상인들이 모였다. 포트리 메인스트릿, 팔리세이드 팍과 레오니아를 관통하는 브로드 상가를 조성하는 것이 첫번째 봉킴의 코리안타운 개발 프로젝트였으며 이때 한인 최초 상인조직인 코리안 경제인 협회가 태동을 했다.

 
뉴저지 발행부수 최대의 일간신문 기자들에게는 봉킴이 한인사회 대변인! 

한인 인구와 비지니스의 급속한 증가를 목격한 미국상인들의 요청으로 급변하는 새로운 코리안 이민사회를 기사화시키는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한인사회의 비공식 대변인 봉킴에게 한인사회의 궁금점들을 조목조목 묻고 즉시 기사화하여 코리안 성공스토리를 지역사회에 퍼트렸다. 아울러 봉킴이 운영하는 월간 생활정보(Dr. Kim's Shopping Guide)도 기사와 더불어 지역 미국지역사회에 자동적으로 알려지는 행운이 있었다. 이당시 레코드신문에 봉킴의 이야기 - 한인의 근면성, 두뇌의 우수성, 높은 교육수준,  경제력, 지역발전에 큰 도움이 된다는 확신을 주었던것들이 지역 주민들로부터 환영 받은이유였다. 미래의 미국을 이끌어 갈수있는 우수한 한인 2세들에게 기대를 걸어보라며 스마트 코리안 이미지를 미주류사회에 뿌리내리도록 총력을 기울였다.

미국생활의 두번째 단추는 높은포복 낮은포복을하여 월간 생활정보라는 잡지회사를 창업한 것이다.

미국생활에서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된다"는 쾌를 읽은 것이 이때이다. 어떤 사업아이템을 가지고 창업을 한다해도 말릴사람은 아무도 없다. 윤리 도덕적으로 큰 허물이 없는한 어떤업종이든 미국창업은 환영 받는 실정이다.  미국 자본주의의 꽃, 스몰비지니스의 엑기스를 뽑기위한 세번째 단추는 용병술을 사용하여 광고수주작전을 수행하는 것이었고, 봉킴은 오랜 세월의 풍파를 헤치고서야 뉴욕 광고계의 야전사령관이란 이름으로 불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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