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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시리더 김충진 한국이앤엑스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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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smile 댓글 0건 조회 711회 작성일 09-09-26 0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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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시리더  김충진 한국이앤엑스 사장
백지 위에 한국전시산업을 그리다
 
 

KIMES 등 한국대표전시회로 키워내… ‘트렌드’ 가장 중시



“따뜻한 우롱차 한 잔 드십시오.”

삼성동 트레이드타워에 위치한 한국이앤엑스 사무실에서 김충진 사장〈사진〉과 티타임은 이렇게 시작됐다. 터키, 중국 등 잇따른 출장으로 피곤할 법도 한데 손수 전통방식으로 차를 내왔다. 김 사장은 직원들과의 티타임을 즐긴다. 김 사장이 차를 배운 곳은 중국 운남성 곤명이다. 운남에 방문했을 때 빼곡히 들어앉은 찻집마다 주인 없이 비어있어 궁금하던 차에 마지막 찻집에 들러 보니 동네 찻집 주인들이 다 모여앉아 북경에서 가져왔다는 차를 품평하더란다. 삶의 여유를 즐기는 곤명 사람들이 인상적이어서 그 때부터 차에 관심을 갖게 됐다.

김충진 사장은 한국 전시 1세대로 꼽힌다. 따뜻한 우롱차를 앞에 두고 ‘전시주최자 김충진의 전시회 이야기’를 들었다.

- ‘김충진’과 ‘전시’라는 두 글자는 뗄 수 없는 사이다. 한마디로 전시는 무엇인가?

과찬이다. ‘전시’는 ‘만남’이다. 필요한 사람끼리 필요한 순간에 만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본다. 만남의 자리에서 여러 가지 개인적인 것부터 정보교류, 판매, 고객관리, 마케팅 등 비즈니스까지 모든 것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과 사람을 만나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 전시라는 업을 하게 된 계기는?

제대 후 편입준비를 하고 있는데, 인척인 당시 김충한 한국일보 부사장(현 한국이앤엑스 회장)이 “아르바이트 좀 해라”라고 해서 우연히 접하게 됐다. 1978년도에 서울경제신문 전시회사무국(1979년 한국일보 전시회 사무국으로 상호변경)에서 처음으로 ‘국제인쇄산업전시회’를 맡았다. 사람을 만나는 일이라 참 좋았고, 새로운 비즈니스 영역이라 아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내가 개척해야 하는 것이 매력적이고, 참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매력에 빠져 30년 넘게 전시 일을 하게 됐다. 스물일곱살 되던 1980년부터는 한국일보 전시사무국 대표를 맡다가 1998년 법인으로 독립해 한국이앤엑스가 탄생했다.

- 그 당시 한국전시산업은 어땠나?

거의 백지상태였다고 보면 된다. 그때는 전시회라고 하면 미술전시회만 생각했지 요즘과 같은 산업전시회를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다들 전시회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전시장도 없던 시절이라 첫 전시회인 ‘국제인쇄산업전시회(1979년)’는 여의도 기계산업진흥회 빌딩에서 열렸다.

전시회에 참가업체를 유치하려면 업체 방문해서 기본으로 대여섯 번, 대여섯 명은 만나야 했다. 담당자, 부장급, 임원, 대표 순차대로 만나 일일이 소개했다. “전시공간을 마련하고 전시품을 전시하면, 우리가 사람들을 모아서 소개할 거다, 참관객이 제품이 마음에 들면 사가게 될 거다”라고 하나하나 설명하면서 유치했다.

업체들이 전시회 참가경험이 없기 때문에 전시품인 기계의 설치부터, 부스 장치까지 하나하나 가르치면서 진행했다. 장치공사업체도 데리고 가서 소개해주고, 디자인은 어떻게 할지, 운송은 어떻게 할지를 가르쳤다. 전시품 디스플레이까지도 직접 해줄 때도 있었다. 거의 백지상태였다고 보면 된다.

그러다 1979년도에 코엑스가 오픈되고, 1982~1983년쯤부터는 코엑스가 전시회를 안정적으로 치루면서 전시산업이 자리를 잡게 됐다. 또 1980년대 초 서울국제무역박람회, 시트라(SITRA)가 열리면서 부터 일반인들에게 산업전시회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 대표전시회 ‘국제의료기기·의료정보전(KIMES)’은?

일본 파트너인 국제이벤트사의 마사끼가 아이디어를 냈고, 김충한 회장하고 같이 만들어보자고 의기투합이 돼서 처음 진행했다. 1980년도에 처음으로 KIMES를 시작했는데 그때는 의료기기 생산하는 국내업체들이 없었다. 그래도 시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첫 회는 정말 어려웠다. 의사들의 인식이 참 다르다. ‘의술=인술’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라 의료기기에 대한 의사들의 관심이 낮았다. 의사들은 오질 않았고, 업체들은 의사들이 와주길 바랬다. 의사협회랑 진행해 전시장에서 평점을 주는 시스템을 마련했는데도 효과는 없었다.

초기 몇 년 동안은 순탄치 않았는데 1980년대 중반에 초음파 등 특수장비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관심이 점점 높아져 자리잡게 된 것이다.

다행히도 ‘의사’에서 ‘업체와 딜러’로 전시회 타겟을 변경하고 B2B 전시회로 만들자라는 전략이 성공해 KIMES가 오늘에 이렀다.

- KIMES의 도약의 시기는 언제였나?

아이러니하게도 IMF때였다. 다른 전시회와 달리 KIMES는 전년도 대비 축소율이 20% 정도에 불과했다. 참가업체들이 ‘의사들은 돈이 있다. 그 시장은 있다’고 본 까닭인지 참가를 포기하는 업체가 많지 않았다.

이때 달러가 1600원까지 오르면서 외산 의료기기에 대한 부담이 커져 국산을 찾게 된 것이다. 그전에는 국산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이때 국내의료기기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고, 결과적으로 KIMES의 도약에도 도움이 됐다. 이와 함께 국내 의료기기 산업이 일어났다.

- KIMES는 잘됐지만, 다른 전시회 상황은 어땠나?

‘국제플라스틱·고무산업전시회(KOPLAS)’와 ‘국제인쇄산업전시회 및 컨퍼런스(KIPES)’가 그때 어려웠던 전시회다. KOPLAS는 코엑스 6개 홀을 빌렸는데 실제로는 1홀과 3홀, 2개만 겨우 채웠다. KIPES도 8홀을 빌렸는데 1.5개홀 규모로 줄었다.

그런데 어려울수록 홍보해야 한다는 말이 있지 않나. 그 전략이 딱 들어맞았다.

예를 들면 그동안 한번도 안 나왔던 당시 업계 11, 12위 기업이 KOPLAS에 30개 부스로 참가하겠다고 했다. 다른 경쟁사는 거의 참가를 포기하는 상황인데, 대형 부스를 차리겠다고 하니 갑자기 부담이 커졌다. 솔직하게 “다른 데는 아무데도 안 나온다. 규모를 축소하는 것이 어떻냐?”고 제안했다. 그런데 무조건 나오겠다고 하더라.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이후 이 업체는 국내 2위로 올라섰다.

당시 전시회에 나왔던 다른 업체들도 모두 적지 않은 오더를 받았다. 그때 어려운 때 일수록 홍보가 필요하다는 것을 확실히 실감했다.

우리도 이때 처음으로 TV광고를 시작했다. 마이너스 비즈니스가 분명했지만 참가해준 업체들을 위해서 전시회 활성화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판단이었다. 그게 오히려 우리에게 더 큰 도움이 됐다.

- 전시회를 진행할 때 역점을 두는 것은?

가장 관심 있게 보는 것은 트렌드다. 1년, 2년에 한 번씩 전시회를 하는데 산업의 흐름을 읽어야 한다. 그래서 조금 앞서 살려는 생각을 갖고 업무에 임하고 있다.

전시산업은 일종의 서비스 산업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만남에 대한 회사의 신뢰도를 높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다른 데서는 제품 퀄리티를 눈을 확인할 수 있지만 전시회는 무형의 상품이기 때문에 출품업체와 관람객의 신뢰도에 따라서 평가가 좌우되기 때문이다.

- 한국이앤엑스를 자평한다면 몇 점?

보기 나름이지만 국제적인 측면에선 60, 65점. 국내전시회랑 비교하면 한 75점, 많이 줘야 80점이다.

우리나라는 지형학적으로 서에서도 동에서도 가장 먼 곳이라 사람들이 오기 가장 어려운 곳이다. 우리나라의 최대 취약점이 바로 이점이다. 비행기 아니면 들어올 수가 없으니까.

- 혹시 시간이 주어졌을 때 꼭 해보고 싶은 뭔가가 있나?

젊었을 때 좀 더 노력했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들이 남는 것들이 많이 있다. 지금껏 노력이 조금 부족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는 ‘현재를 잡자’라고 살았지만, 50대 중반에 들어서니 방향을 재확인하는 시간을 갖고, 방향이 맞는 길을 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비즈니스라고 하면 수익을 먼저 생각하게 되지만, 나는 명분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더 단단한 기반을 만들고 싶다.

- 앞으로 목표는?

독일의 가장 큰 인쇄전인 ‘Druck + Form’과 의료전인 ‘Medica’ 수준까지 우리 KIMES를 키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질로는 승부할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 ‘전시회 플러스 컨퍼런스’ 전략으로 세미나를 국제화해서, ‘뭔가를 얻기 위해 이 전시회를 가야 한다’라고 생각하게 만들겠다. 규모로는 힘들다. 우리나라는 시장이 없기 때문이다.

‘KOBA’를 아시아에서는 가장 중요한 방송전시회로 키우는 것도 또 다른 목표다. 방송관련 전시회로는 미국의 ‘라스베가스 방송기자재 박람회(NAB)’와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국제 방송 장비 전시회(IBC)’, 일본의 ‘인터 미디어 포럼’이 가장 크다. 이중 NAB와 IBC가 ‘전시회 플러스 컨퍼런스’ 전시회로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여기서 모든 신기술이 발표돼 모두가 찾는다. ‘인터 미디어 포럼’도 크고 있지만 일본은 소극적이다. 일본보다 큰 전시회로 만들 생각이다. 작년에 코바 기간 동안 방송연합인 공동체와 공동으로 94개 섹터에 대한 세미나를 열었던 것이 시작이다.





김충진 한국이앤엑스 사장은



전시산업 30년 외길… 전시회 130여회 개최


195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동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 의기대학 물리요법과를 졸업했다. 국내에 전시회가 전무했던 1978년부터 서울경제신문 전시회사무국에 입사했다. 1980년부터 한국일보 전시회사무국 대표를 맡아 국내전시산업을 선도하고 개척해 온 한국 전시업계의 산증인이다. 30여년간 전시산업에 몸담아온 그는 오늘날까지 130여회의 산업전시회를 개최해 왔다. 그가 이끌던 한국일보 전시회사무국은 1998년, 주식회사 한국이앤엑스(Event & Exhibition)로 법인 독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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