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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신료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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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ngel 댓글 0건 조회 2,132회 작성일 12-12-12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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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신료(香辛料)와 장(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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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신료는 음식에 감칠맛을 더하고 향기와 색상을 더해 입맛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한다. 식물의 열매, 씨앗, 꽃, 뿌리가 모두 향신료가 될 수 있으며 대항해시대를 통해 세계 여러 곳에 전파되어 각국의 식생활을 변화시켰다.
<출처: gettyimages>

향신료는 식물의 열매, 씨앗, 꽃, 뿌리 등을 이용해서 음식의 맛과 향을 북돋거나, 색깔을 내어 식욕을 증진시키고 소화를 도우며, 육류의 누린내와 생선의 비린내를 없애는 기능을 한다.
향신료에는 후추, 겨자, 고추, 바닐라, 사프란, 생강, 계피, 육두구, 올스파이스, 정향, 통카 열매, 고추, 깨, 파, 마늘 등 그 종류가 매우 많다. 또한 넓은 의미에서 간장, 된장, 고추장 등 장류(醬類)와 설탕, 소금도 향신료에 포함된다.

콩의 원산지는 한반도와 만주 일대로 알려져 있다. 일찍부터 우리 조상들은 콩을 이용하여 장류를 만들어 먹었다. 장(醬)은 음식의 우두머리(長)로 여겨졌다. 408년에 만들어진 고구려 덕흥리 고분의 묵서명(墨書銘)에는 무덤 주인공의 집에 아침에 먹을 간장(鹽豉)을 한 창고 분이나 두었다고 적고 있다. 또 683년 신라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이 왕비를 새로 맞이할 때 처가에 보낸 물품에는 간장, 된장 등이 대량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1424년 조선에서는 강원도의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창고에 저장된 식품을 방출하여, 15세 이상 남녀에게 쌀 4홉, 콩 3홉, 장3홉을 주었고, 그 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은 약간의 차등을 주어 나눠주었다. 이처럼 장류는 우리조상들에게는 식품첨가물인 향신료가 아니라, 필수 식품일 정도로 소비가 많았다. 간장, 된장 등만 있으면 반찬 걱정을 하지 않을 정도였다.
향신료는 각 나라의 식생활에 따라 그 범위와 종류가 다르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경우도 장류는 향신료와 별개로 보는 것이 옳겠다. 우리 조상들은 장을 주로 소비하였고 고려시대 이후 육류 소비가 적었던 만큼, 유럽 사람들에 비해 외국의 향신료에 대한 관심은 적었다. 하지만 미각이란 언제나 새로운 맛을 찾는 만큼, 우리 역사에도 다양한 향신료가 들어와 사용되었다.
 
마늘과 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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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 기록에 등장하는 가장 오랜 향신료는 단군신화에서 곰과 호랑이가 먹었다는 산(蒜)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산은 달래, 마늘을 다 일컫는다. 달래는 자생종이고, 마늘은 외부에서 들어온 것이다. 마늘의 원산지는 이집트, 또는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이집트에서는 기원전 2,500년 전에 피라미드를 건설할 때 노동자들에게 마늘을 지급할 정도로 마늘 소비의 역사가 오래되었다. 중국에서는 마늘이 기원전 2세기에 장건(張騫)이 가지고 왔기 때문에 호(葫)라고도 하고, 대산(大蒜)이라고도 한다. 마늘이 초원길을 타고 유목민에 의해 전해졌다면 고조선 시대에도 소비되었을 가능성이 있겠지만, 고조선 사람들이 먹었던 매운 맛을 내는 향신료라면 단연코 달래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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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은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향신료로 이용되었다. 마늘은 마늘의 강한 향은 액을 쫓는 힘이 있다고 여겨졌다. <출처: getty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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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신화에서 곰과 호랑이가 먹었다는 향신료는 달래일 가능성이 높다.
720년에 완성된 일본의 고대 역사서인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서기 110년 기록에 마늘 관련 기사가 등장하는데, 마늘이 귀신을 몰아내고 요사스런 기운을 쫓아냈다고 한다. 이 기록의 연대는 신뢰할 수는 없지만, 마늘이 삼국시대에 한반도를 거쳐 일본 열도에도 전해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삼국사기] 〈제사지(祭祀志)>에는 신라에서는 매년 입추(立秋) 후 해일(亥日)에 산원(蒜園)에서 후농제(後農祭)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 산원은 야생 달래보다는 마늘을 재배하는 밭일 가능성이 크다.
마늘이 내는 강한 향기는 악귀나 액을 쫓는 힘을 갖고 있다고 여겨져, 복숭아, 고춧가루와 함께 제사 음식에는 쓰지 않는다. 또한 마늘은 수련을 방해하는 음식인 오신채(五辛菜- 마늘, 파, 부추, 달래, 생강)의 대표적인 식품으로 여겨져 불가(佛家)에서 금하는 식품이다. 하지만 달래보다 강한 맛을 내는 마늘은 비린내를 없애고 음식의 맛을 좋게 하며 식욕 증진 효과가 높기 때문에, 삼국시대 이후 우리나라 음식 맛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향신료로 자리 잡았다.
 
오래 전부터 먹었던 향신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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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6년에 편찬된 의학서인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의 부록인 <방중향약목초부(方中鄕藥目草部)>에는180여종의 약재가 적혀 있다. 이 가운데에는 마늘(大蒜), 부추(菲), 염부추(薤), 파(葱), 겨자(芥子), 생강(生薑), 천초(川椒) 등의 향신료도 약재로 포함되어 있다. 향신료를 뜻하는 영어 스파이스(spice)는 라틴어로 ‘약품’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도 향신료는 약재로도 여겨졌던 것이다.
생강은 혈액순환 촉진, 소화불량 등에 효과 있는 약용 식물로 기록되어 있는데, 본래 인도가 원산지로 약 2,500년 전에 중국에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사(高麗史)] 〈병지(兵志)>에는 1018년 현종(顯宗, 재위: 1010~1031) 9년 이후부터 북쪽 변방에서 싸우다 죽은 군사들의 부모와 처자(妻子)에게 차와 생강, 옷감(布物)을 차등 있게 나눠주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나라에서 생강을 나눠 준 것은, 생강이 활발히 소비된 물건으로 교환가치가 큰 것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또한 국가에서도 대량으로 생강을 보관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생강의 전래 시점도 1018년보다 훨씬 앞선 통일신라나 삼국시대로 올려 볼 수가 있겠다. 우리 조상들은 생강을 음식에 넣기도 했지만, 생강차, 생강주 등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겨자는 중앙아시아가 원산지로 삼국 또는 그 이전부터 겨자가루, 겨자유 등으로 사용하여왔다. 부추, 염부추, 파 등은 중국과 서역이 원산지로 기원전 시기부터 소비되었던 향신료인 만큼, 일찍부터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계수나무의 껍질인 계피는 청량감과 단맛이 있어 수정과, 떡 등 다양한 요리에 사용되었으며 매우 오래 전부터 소비된 향신료다.
설탕은 인도가 원산지로, 중국에서는 7세기에 인도로부터 설탕 제조법을 배워 상품으로 거래를 했었다. 일본의 경우 754년에 당나라 승려가 처음으로 가져왔다고 한다. 따라서 일본에 전해지기 전 통일신라 사람들도 당나라에서 설탕을 수입해 맛보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는 송(宋), 원(元)에서 설탕을 수입해 사용했고, 고려 말기에는 백설기에 설탕을 넣어야 제 맛이라고 여길 정도로 소비되곤 했으나, 여전히 무척 귀한 식품이었다. 설탕을 우리나라 서민들이 맛보게 된 것은, 20세기 초 일제 강점기에 타이완에서 재배된 설탕을 배급받은 것이 시작이다. 설탕은 1950년대까지도 귀한 식품이었다.
 
수입된 향신료- 정향과 육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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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향신료는 후추, 시나몬(Cinnamon- 육계나무의 껍질), 정향(丁香, Clove), 육두구(肉荳蔲, Nutmeg)등을 들 수 있다. 자메이카 원산으로 육두구, 정향, 시나몬(계피) 3가지 맛을 겸비한 올스파이스(Allspice)는 비교적 새로운 향료로 최근에야 우리나라에 알려졌고, 이란이 주생산지로 유럽에 널리 알려진 사프란(Safran)도 우리 나라에 소개된 지 얼마 되지 않는다. 또 지중해가 원산지인 월계수 잎은 최근에야 파스타 등의 소비가 늘면서 수입이 늘어나고 있는 향신료다. 하지만 동남아시아가 원산지인 정향과 육두구는 조선시대 초에 이미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정향은 고기의 누린내를 없애주고 방부효과가 탁월한 향신료이며, 육두구는 강장제 등의 약제로도 사용하는 한편 생선요리 등에 소스로 사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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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향은 정향나무의 꽃봉오리로, 인도네시아 몰루카섬이 원산지이다. 육류의 누린내를 잡아주기 때문에 돼지고기 요리에 주로 쓰이며, 푸딩, 수프, 과자류에도 이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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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두구는 인도네시아 몰루카제도가 원산지로, Nutmeg란 이름은 사향향기가 나는 호두라는 뜻이다. 조선시대 초에 우리나라에 전해져 생선요리 등에 쓰였다.
1401년 명나라는 조선의 말(馬) 1만 필과 바꾸기 위해, 면포, 모시, 명주실 등과 함께 각종 약재, 그리고 정향(丁香), 육두구(肉豆蔲), 양강(良薑: 생강 보다 강한 향신료)을 보내온 바 있다. 1421년에는 일본의 일기주(一岐州)의 도주(島主)가 육두구 20근 등을 바쳐온 바 있었다. 해외교역이 활발했던 유구국(琉球國)에서도 1483년 후추 500근과 함께 육두구 100근을 바친 바 있었다. 이처럼 정향과 육두구는 명, 일본, 유구국을 통해 조선에 들어왔지만, 직접 교역이 아닌 간접 무역을 통해 들여온 물건이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공급이 될 수 없어서 소비 또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후추를 적극 구했던 조선 성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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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후추는 달랐다. 후추의 매운맛은 조선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것이었다. 인도가 원산인 후추는 기원전 120년경 서역을 거쳐 중국으로 전해졌다. 후추는 기원 전후 시기에 우리나라에도 전해졌고, 호초(胡椒)라 불렸다. 후추는 통일신라시대까지도 귀한 식품으로, 불교의 차 공양을 위한 후추차의 재료로 사용되기도 했다. 고려시대에 와서 후추 수입은 늘어났는데, 조미료로도 널리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고려사]에는 1389년 유구국(琉球國)에서 후추 300근을 바쳤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1323년 원나라에서 고려를 거쳐 일본으로 항해하던 배가 신안 앞바다에 난파되는 일이 있었다. 이 배는 1970년대 중반부터 발굴되기 시작했는데, 배 안에서 후추가 다량으로 발견되기도 했다. 후추는 동아시아에서도 중요한 교역품이었다. 후추는 특히 중국에서 많이 소비되었는데, 14세기 중국의 연간 후추 수입량은 유럽 전체보다 많았을 정도였다.
특히 조선의 성종(成宗, 재위: 1470∼1494)은 후추를 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조선은 일본 상인으로부터 후추를 수입하고 있었는데, 1482년 성종은 후추의 씨앗을 구하라고 예조에 명을 내렸다. 성종은 대마도주, 일본 사신, 상인에게 부탁해 후추의 씨앗을 얻고자 했다. 일본 상인들은 조선에서 후추를 구하려는 것을 알고, 비싼 대가를 요구하기도 했다. 1485년 조선은 대장경을 원하던 일본에게 후추 씨앗과 교환하자고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후추 씨앗을 구해오라는 성종의 계속된 어명에도 불구하고 일본 역시 후추를 직접 생산하는 나라가 아닌 만큼, 씨앗을 구해오지는 못했다.
일본은 조선에서 후추를 구한다는 것을 알고 대량으로 후추를 가져왔고, 조선의 창고에는 후추가 지나치게 많아졌다. 그러자 성종은 1488년과 1489년에 종친들과 신하들에게 후추를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당시 후추는 더위 먹은 병을 치료하며, 두통 등을 치료하는 한약재로도 쓰이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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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들은 후추를 얻기 위해 유럽에서 동남아시아로 이어지는 직항로를 개척하려 했고, 이것이 세계사를 바꾼 계기가 되었다.
후추는 교역 이익이 큰 무역상품이었기에 조선의 성종도 후추 씨앗을 구해 조선에서 직접 생산해 중국에 수출하고자 했다.
성종이 후추 씨앗을 구하고자 한 것은 조선에서 후추를 생산해 중국에 팔고자 함이었다. 조선은 이미 중개무역을 통해 후추를 중국에 팔고 있었다. 1496년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 온 남곤은, 임금께 “후추(胡椒)는 무역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많기 때문에 명나라 서울에 가는 사람들이 반드시 많이 가지고 갑니다. 하지만 후추는 우리나라 산물이 아니니, 이를 금지하게 하소서”라고 아뢰기도 했었다.
육두구, 정향 등을 간접 무역을 통해 수입하던 조선도, 후추만큼은 일본을 통해 들여와 중국에 다시 수출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만큼 후추는 교역의 이익이 컸던 상품이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끝내 후추를 생산하지는 못했다.
유성룡(柳成龍, 1542∼1607년)이 쓴 [징비록(懲毖錄)]에는 후추와 관련된 다음의 일화가 적혀있다.
“(1586년) 일본 사신 다치바나야스히로(橘廉廣)이란 자가 조선에 오자, 예조판서가 그를 맞이해 잔치를 베풀었다. 이때 그는 후추를 한 주먹을 꺼내서 자리에 뿌렸다. 그러자 기생, 악사들이 달려들어 후추를 줍느라고 잔칫상이 금세 아수라장이 되었다. 야스히로는 이를 보고 아랫사람들의 기강(紀綱)이 이 모양이니 조선은 곧 망할 것이라고 했다.”
유성룡은 당시 조선의 기강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지만, 후추가 워낙 값비싸고 귀한 물건이기 때문에 이런 소동이 벌어졌던 것이다. [국조보감(國朝寶鑑)]에는 1833년 12월에 내탕고에 있던 후추 150두를 경기, 호서, 영남에 나누어 백성을 구하는 비용(賑資)에 보태 쓰게 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 정도로 후추는 비싼 물건이었다. 하지만 조선 사람들은 유럽인들처럼 직접 동남아시아로 가서 후추를 구입하는 열의를 보이지 못하고, 일본과 유구국을 통해 수입하는데 그쳤다. 값비싸고 귀한 향신료였던 후추가 값이 싸진 것은 20세기 이후의 일이었다.

고추는 언제부터 먹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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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향신료는 고추다. 매운 고추를 고추로 만든 소스인 고추장에 찍어먹고, 고추가 듬뿍 든 김치를 먹는 한국인의 고추 소비량은 엄청나다. 고추는 아메리카가 원산지다. 고추가 한국에 전해진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으나, 대체로 1592년 이후에 전해진 것으로 본다. [홍길동전]의 저자로 유명한 허균(許筠,1569〜1618)이 쓴 [도문대작(屠門大爵- 전국 팔도의 명물 토산품과 별미음식을 소개한 책)] 중에 초시(椒豉) 즉 고추장이 기록되어 있는 만큼, 고추는 아메리카에서 발견된 이후 약 100년 만에 조선에도 전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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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는 우리의 음식문화를 바꾼 대표적인 향신료이다.
온대기후에서도 잘 자라는 탓에 널리 재배되었고, 1700년 무렵 김치에 고춧가루를 넣기 시작하면서 소비량이 급증하였다. <출처: gettyimages>
다른 향신료와 달리 고추는 온대 기후에서도 잘 자라는 특성 탓에 우리나라에서 크게 환영받았다. 고추는 1700년 무렵 김치에 넣어 사용되면서부터 소비량이 급증했다. 겨울에 야채를 먹기 위해 담그기 시작한 김치는 소금을 넣어 짜게 절여야 오래 보존할 수 있다. 그런데 소금만으로 짜게 담그면 김치에서 쓴 맛이 난다. 이 점을 보완하기 위해 김치에 젓갈을 넣게 되는데, 젓갈을 넣은 김치는 맛은 좋아지지만 비릿한 점이 있다. 이 비릿한 맛을 없애려면 후추, 초피(천초, 산초)와 같은 향신료를 넣어야 한다. 우리나라 기후에도 맞는 고추가 전래된 이후부터 김치에 고춧가루를 넣어 매운 맛을 내면서, 김치는 크게 발전하여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이 되었다.
 
고추 이전의 매운 맛, 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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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매운 맛을 좋아한다. 고추가 전래되기 전에 서민들이 매운 맛을 내기 위해 사용한 것은 값비싼 수입품인 후추가 아니라, 초피였다. 초피나무는 높이 2m 정도의 키 큰 낙엽수로 9월에 열매가 익는다. 열매에서 종자를 빼낸 과피가 향신료로 쓰이는데, 특히 우리나라에서 미꾸라지로 만든 추어탕을 먹을 때는 으레 초피가루를 넣어 맛을 낸다.
그런데 초피는 대량생산을 하기 어렵다. 나무에서 열매를 따고 씻어서 말리고 가루로 빻아야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고추는 대량 생산이 가능한 값싸고 좋은 향신료였으므로, 초피를 대신해 매운 맛을 내는 대표 향신료로 우리나라에서 사랑을 받게 된 것이다.
 
보편화된 향신료

한때 보석보다 비싸게 거래되던 향신료였지만 아메리카 대륙에서 고추, 바닐라, 올스파이스 같은 새로운 향신료가 발견되면서, 동남아시아 향신료의 가격이 떨어졌다. 특히 후추만큼 맵고, 온대 지역에서도 자랄 수 있는 고추는 우리나라에서 크게 환영받았다. 향신료가 값싸지면서 향신료의 사용 또한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다양한 향신료의 사용은 음식의 맛을 크게 바뀌었고, 식생활도 변화시켰다. 향신료는 세계사를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고추와 같은 향신료는 우리 음식문화마저도 크게 바꾼 셈이었다.
김용만 /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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