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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김수환 추기경 - 동양화가 김정자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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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Friday 댓글 0건 조회 1,847회 작성일 14-09-21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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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 길이가 27m라고요? 설악산의 어디를 보고 그린 것이지요? 누가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 도대체 밥은 먹어가면서 그린건가요?”

대형 수묵화 ‘설악산 대망’을 선보인 전시회장에 들어선 김수환 추기경은 작가에게 쉴 새 없이 질문을 늘어놓았다. 작가와 오랜 인연이 있었지만, 새삼 작품을 통해 만나는 모습이 새로운 듯 놀란 김 추기경은 한참 동안 그림을 들여다봤다. 들릴듯 말듯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산의 모습’이라고 중얼거렸다.

김정자(마리스텔라·76) 화백은 김 추기경을 처음 만난 이후 45년간 아버지처럼 따랐다. 김 추기경은 교회 안팎의 크고 작은 일에 봉사해온 김 화백을 딸처럼 동생처럼 친구처럼 도닥여줬다. 그 오랜 인연의 기억은 김 화백이 인생의 보물로 꼽는 이른바 ‘작은 항아리’ 안에 차곡차곡 담겨 있었다.

# 양복이 한 벌밖에 없나?

김수환 추기경님을 처음 만난 때가 언제였던가? 1964년 가톨릭신문(당시 가톨릭시보) 사장으로 재직하던 시절로 기억한다.

그 첫 모습은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겸손한 미소와 몇 박자 늦게 들리는 경상도 말씨가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강하게 각인된 것은 대문을 열고 들어온 김 추기경님의 양복이 너무 후줄근하다는 생각이었다. 소매 끝과 바짓단이 닳아 꼬질꼬질한 양복, 낡고 색이 바랜 구두. 신발을 벗고 들어서는 뒷자리를 정리하다 마주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추기경님 양복은 초겨울에나 입을 법한 두꺼운 것이었다. 당시는 여름 끝무렵이었다. ‘양복이 한 벌밖에 없나?’ 당시 스쳐간 생각이었다.

# 초콜릿 한 상자

이후 JOC(가톨릭노동청년회) 창립 관련 일을 도우면서 추기경님을 자주 뵙게 됐다. 서울대교구 안팎의 크고 작은 행사 등을 준비하면서도 평신도 봉사자로서 거의 매주 마주할 수 있었다. 교회 일에 바쁘신 가운데서도 명동성당에서, 명동 길가에서, 교구청에서 만날 때마다 추기경님은 건강에 대한 안부와 작품 창작에 대한 질문을 꼭꼭 던지셨다. 특히 피곤하면 어떻게 하고, 밥은 잘 챙겨먹으며 일하는지 늘 염려해주셨다. 내가 항상 영양부족 상태라고 생각하신 듯 했다. 그러면서 초콜릿을 먹으면 기운이 난다는 조언도 자주하셨다. 직접 초콜릿을 건네주신 적도 많았다. 어느 날엔 봉사 관련 단체 일을 보고하러 집무실에 들렀더니 책 한권을 선물로 주셨다. 추기경님이 분주하게 업무를 처리하는 시간이었던 터라 별다른 질문을 할 틈도 없이 받아서 나왔다. 집에 돌아와 어떤 책일까 궁금해 하며 풀어보니 초콜릿이 가득했다. 두꺼운 책처럼 생긴 그것은 당시엔 보기 어려웠던 초콜릿 상자였다.

# 함께 만든 도자기에 담긴 추억

김 추기경님과의 추억이 담긴 작은 항아리를 열어 볼 때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추억이 있다.

1981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가톨릭대학교 신학부 기숙사를 건립하던 때였다. 교구 가톨릭여성협의회와 각 평신도 단체 등은 다양한 방법으로 건립 후원금 모금에 나섰는데, 그 중 바자도 계획됐다.

바자에서 판매할 물품 중 도자기를 제작해 달라는 제안을 받고, 추기경님과 함께 이천 김기철 요(窯)를 방문했다. 바자 출품 도자기에 내가 그림을 그리고 추기경님의 친필 서명을 새겨야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만든 도자기들은 추기경님과 내가 공동으로(?) 제작한 가장 멋진 작품이라고 기억한다. 불가마 옆에 마련된 작업장에서 나는 온종일 초벌구이한 도자기에 산과 나무, 꽃, 달 등을 그렸고, 추기경님은 그림 반대쪽에 글씨를 쓰셨다. 추기경님은 처음 몇 번은 실수를 하셨지만, 쓰면 쓸수록 점점 근사한 명필을 선보이셨다. 그렇게 만든 도자기가 총 세 가마 정도였었다.

작업장을 떠나기 전 가마속 불길을 한참 들여다보시던 추기경님이 한마디를 던지셨다. “성령의 불꽃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완성된 도자기들은 바자가 시작되자 한두 시간 만에 다 팔려 나갔다. 뒤늦게 온 이들은 불량품이라 판매하기 어려운 작품까지도 억지를 써가며 사갔다.

그때의 작은 항아리는 내 마음 속에도 하나 간직돼 지금까지 나의 소중한 인생에서의 경험과 이야기를 담아주는 보물이 됐다. 추기경님도 이천에서 도자기를 만들었던 이 일화를 2000년대 들어서까지도 종종 언급하곤 하셨다.

#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

교구장으로서 바쁜 일정 중에도 김 추기경님은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도 자주 내비치셨다. 본인은 잘 모르니까 설명을 해달라며 진지하게 듣곤 하셨다. 특히 운보 김기창 선생님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셨다. 추기경님은 운보 선생님의 세례성사를 주관하신 이후 여러 번의 병자성사와 장례미사 주례까지 직접 해주셨다.

운보 선생님은 나의 스승이었다. 때문에 추기경님은 늘 나에게 운보 선생님의 안부를 물으셨다. 아무리 바빠도 운보 선생님의 전시회는 꼭 가셨고, 오랜 시간 진지하게 작품을 감상하는 모습을 보이셨다. 또 운보 선생님에게는 당신이 직접 돌보고 챙겨줘야 하는 아이를 대하듯 유달리 애정을 보이셨다. 추기경님과 운보 선생님이 대화할 때면 두 분 모두 꼭 아이처럼 순수하고 해맑아 보였다. 아, 그러고 보니 병문안 할 때마다 주변 사람들을 웃음의 도가니로 빠져들게 하는 것도 추기경님의 역할이었다. 운보 선생님이 입원한 기간 동안 병원을 찾을 때면, 늘 안수를 청하는 이들이 줄지어 섰다. 추기경님은 아무리 바쁜 일정이 있어도 꼭 그들에게 안수를 준 후 병원을 떠나셨다.

김 추기경님은 언제나 재치 있는 말씀으로 주변 사람들을 편안히 대해주시고, 미소 짓게 하신 분으로 기억된다. 한번은 내가 라틴어를 공부할 계획이라며 모 신부님께 사전 한 권을 얻었다고 말씀드릴 기회가 있었는데 오래된 사전을 보시더니 ‘잘 보관하면 골동품으로 비싸게 팔리겠는걸’하며 농담을 던지기도 하셨다.

# 결코 잊을 수 없는 조언

추기경님을 떠나보내고 굳이 그분의 모습에 대해 정의하자면 용기와 희망을 가득히 부어준 분이라고 표현하면 될까….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복잡한 문제를 앞두고 있어도 언제 어느 때나 김 추기경님은 침묵하고 기다리시는 모습이었다. 온갖 업무와 인간관계 안에서 솔직히 머리끝까지 화가 나실 법한 상황을 겪으면서도, 추기경님은 입을 다물고 침묵하셨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것이 바로 평화에 이르는 지름길이었던 같다.

나에게도 인생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조언을 자주 해주셨다.

학교 교사직에서 은퇴한 이후 나는 성서백주간 봉사자로 활발히 활동해오고 있다. 하지만 활동 중에 크고 작은 문제에 늘 부딪히곤 했다. 어느 날 화를 참지 못해 하소연하는 나에게 추기경님이 말씀하셨다.

“선생에게 막 달려드는 사람이 있으면, 옆으로 잠시 비켜서보세요. 그러면 달려오던 사람이 선생과 부딪치지 않고, 계속 달리기만 하겠죠. 한참 있다 뒤돌아봐요. 그 사람은 어디까지 갔을까요?”

그러시면서 추기경님은 “웃으면서 비켜설 때 수호천사가 나의 웃음을 날개에 묻혀 하느님께 보고할 것”이라고 덧붙이셨다. 신앙인으로서의 품위를 갖추기 위해서는 자꾸 훈련을 해야 한다고, 또 어떤 일이든 먼저 하느님께 부탁드리고 본인이 할 수 있는 순서가 왔을 때에 행동하라는 조언도 잊지 않으셨다. 돌이켜보면 내 모습에 대해 칭찬 한번 해주신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건네시는 말씀 한마디 한마디는 정말 눈물이 나도록 감사한 기억들이다.

# 여전히 짙은 그분의 향기

“아, 내가 이제 정말 고아가 됐구나.”

지난 2월, 김 추기경님의 선종 소식을 전해 듣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추기경님은 진정 나의 아버지 같은 분이셨다.

그리고 곧바로 나의 못된 모습에 가슴을 쳤다. 추기경님이 입원해 계실 때도, 내가 미워하는 ○○가 병문안 간다고 하니까 안가고, ○○가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 또 안가고, 나의 바쁜 일이 있다고 핑계대며 안가고…. 이기적인 내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난 듯해 마음이 아팠다. 아직도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사람 노릇하기엔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김 추기경님 덕분에 내가 이만큼이라도 사람 노릇을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새삼 다가온다.

김 추기경님의 모습을 떠올리면 기억에서 덜어내어 지는 것이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온전히 채워져 가는 느낌이다. 하느님 안에서, 믿음 안에서 더욱 자유로우셨던 그분이 남긴 향기는 여전히 짙다.

“믿으면 이해가 되고, 안 믿으면 이해가 안 된다”는 추기경님의 말씀이 오늘따라 더욱 긴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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