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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곤 Installation 할렘의 어둠이 ‘창작의 빛’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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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스티비아 댓글 0건 조회 3,502회 작성일 11-09-19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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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곤 Installation 브르클린 전시 2
 
 
변종곤의 오브제 작업은 빈한한 현실 생활의 배경에서 탄생했다. 마치 파리의 이응노가 경제적 절박함에서 콜라주를 시작한 것처럼, 우연하지만 운명 같은 계기가 작용했다. 아무튼 남의 나라 땅에서 직업을 가지지 않고 작품 활동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한국 미술가들의 해외 체류사에서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변종곤의 뉴욕 생활도 하나의 드라마와 같다.
변종곤 아트스튜던트 리그에 다녔다. 집에서 100블럭 이상의 거리를 걸어서 다녔다. 어느 날 커피를 마시다 돌연 쓰러지고 말았다. 제대로 먹지도 못한 데다 너무 많이 걸어서 탈진한 것이다. 깨어나보니 안면이 있는 한국 아주머니가 200달러를 주머니에 넣어둔 것이다. 내 처지가 너무 부끄러웠다. 결국 돈을 되돌려 드리고, 그날부터 일자리를 찾아나섰다. 그래서 3개월간 생선가게에서 일했다. 나는 산 짐승 목을 따는 게 너무 힘들었다. 길거리 지나가다 나도 모르게 개미는 죽일 수 있을지 몰라도…. 시력이 나빠 늘 손을 다쳤다. 주인이 생선 목을 자르지 말라고 했는데, 목을 잘라 싸우고, 배달 잘못 해서 문제 일으키고…. 군복을 입고, 선글라스를 쓰고, 피묻은 손을 비닐로 감싸고 집으로 돌아오면 그 흉흉한 행색 때문에 아무도 날 건드리지 않았다. 그런 중에 나는 그림을 그렸고, 〈할렘가 풍경〉을 생선가게 뒷벽에 걸어두었다. 어느 날 그 작은 그림을 한 신사가 ‘발견’하면서 내 삶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이 신사가 내 그림을 여기저기 주선해 3만 달러나 팔아줬다. 당시 3만 달러면 소호의 작은 빌딩을 살 수 있는 큰 돈이었다. 이 분이 리버데일(Riverdale)갤러리를 운영하던 핼뮤트라는 갤러리스트였다. 덕분에 나는 작품 생활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그 분이 나한테 말했다. “마음대로 작품 해라. 마음껏 경험해라. 자유없는 나라에서 30년 살았으니 이젠 풍부하게 인생을 즐겨라.” 그는 내가 제일 어려웠을 때 운명처럼 만났던 아버지 같은 분이다. 지금은 은퇴해서 복원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______변종곤은 1985년에 처음으로 미국인이 운영하는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리고 88서울올림픽 이후 재미화가라는 타이틀로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펼쳤다. 변종곤 작품의 뿌리에는 언제나 동양의 전통, 한국의 정신이 깔려 있다. 그는 자주 자신이 몽골리안의 후손이며 기마민족의 후예인 한국인임에 자부심을 드러낸다. 그는 언제나 고향을 느끼며 고향을 만나며 살고 있다.
변종곤 첫 개인전에서는 아이들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한국에 두고 온 아이들 때문에 고통이 컸다. 길을 지나다 인형을 주웠다. 몇 년간 얼굴을 시계로 바꿔 소리나는, 기계 부속 같은 어린이를 만들었다. 내 작품은 근본적으로 인간 이야기다. 그래서 작품이 모두 인간을 닮았다. 뉴욕에서 첫 개인전을 열고 나는 이 일을 평생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 일만 할 수 있는 기회와 여유가 있으면 더 없는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내 작품을 두고 다른 사람들은 서양 작가를 거론했다. 나는 그런 작가의 작품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나름대로 오브제로 작품전을 열었는데, 뉴욕 사람들은 동양을 잘 몰랐다. 어쩌면 그게 결국 나한테 유리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나는 깊이는 부족하지만 불교 같은 동양의 종교에 대한 감성이 풍부했다. 어린 시절 할머니께서는 날 데리고 다닐 때 자기보다 큰 돌이나 나무가 있으면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하셨다. 큰 달만 뜨면 길거리에서 엎드려 절을 하셨다. 자연 숭배가 삶 속에 배어 있었다. 절, 교회, 성당을 다 다녔다. 어릴 때였으니까…. 교회는 공포였다. 절의 지옥도도 너무 무서웠다. 그런 오랜 문화적 체험이 내 삶과 작품을 동여매는 풍부한 끈이었다.
______오브제 작품의 대표 시리즈라 할 수 있는 현악기는 어떻게 시작했는가? 어떤 작품 시리즈보다 대중적 상업적 인기를 누리는 작품이다.
변종곤 바이올린을 보니까 여성의 나체를 닮았더라. 바이올린을 벽에 걸어두니 이 물건이 날 유혹하는 게 아닌가. 그게 아주 민감한 감정을 던져줬다. 그래서 푹 빠지게 되었다. 작지만 집중력이 아주 강하다. 이 완벽한 조형, 그 재미에 빠졌다. 바이올린 작품은 전시 오픈 때 작품이 매진됐다. 고상하고 품위 있어 결혼 선물로 최고라는 것이다. 그때 그림이 아주 잘 됐다. 손놀림이 좋았다. 재주를 한껏 부렸다. 달콤한 유혹이 너무 많았다. 작품이 경제적인 도움을 주니까 욕심이 생겼다. 하지만 이 때가 작가로서는 위험하다. 이래서 작가가 망하는구나 싶었다. 이러다간 도장 파는 사람 비슷하게 되겠다 싶어 바이올린 작업을 멈췄다. 원래 취지와 달리 돈벌이했다고 반성하고 한참 동안 바이올린을 그리지 않았다. 그런데 콘트라베이스와 대결하면서 좀더 진지해졌다. 이건 바이올린과 달랐다.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악기가 나에게 많은 걸 가르쳐 줬다. 악기는 마모가 되어야 한다. 금이 간다든지 그 나름의 캐릭터가 있어야 한다. 우선 내 마음에 들어야 한다. 악기와 내가 서로 교감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악기를 꼭 비싼 돈으로 구입한다.
 
창작의 영감은 여행, 서점, 벼룩시장
______골동품이나 민예품 같은 오브제는 모두 어디에서 수집한 것일까. 시간과 노력의 투자가 예사롭지 않다. 또 오브제에 결합한 소품들은 패션 감각이 아주 뛰어나다. 변종곤은 미술뿐만 아니라 주변 문화 장르에도 관심이 아주 많다.
변종곤 내 그림 공부는 여행을 통해서 이뤄진다. 인도 페루 아마존 이집트 아프리카 등 수십 년간 세계 여러 지역의 문명을 경험했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은 꼭 맨해튼의 스트렌드(Strand) 서점에 간다. 또 벼룩시장을 찾아다니거나 음악회에 간다. 옷가게에 가서 패션 디자이너들과 자주 만난다. 그들은 계절을 앞서 사는 민감한 감성을 지니고 있어 유익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영화, 건축, 패션에 관심을 가지다 보니 내 작품의 표현이 더 풍부해진다. 이런 다양한 경험이 축적되니 세상을 보는 폭이 넓고 깊어진다. 나는 그 경험에서 흘러나온 아이디어가 넘쳐 나서, 그게 너무 재미있어 마법에 걸린 듯 환자처럼 스튜디오에 파묻혀 산다. 나는 오직 나한테만 시간을 투자한다.
______물건에 대한 집착, 사물에 대한 호기심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변종곤은 성장기에 어떤 시각 체험을 겪었을까? 미술 수업 시절을 어떻게 보냈을까?
변종곤 나는 2남 3녀의 막내였다.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할머니 손에 컸다. 할머니는 부유하셨고, 아주 당당한 여성이셨다. 나는 일본 집에서 스시와 우동, 바나나를 먹고 다녔다. 귀족처럼 살았다. 동네 주면에 화려한 요리집이 많았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입술 연지를 바른 예쁜 얼굴의 기생들이 요리집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할머니는 나를 아주 자유분방하게 키우셨다. 다섯 살 때부터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그릴 때가 제일 행복했다. 할머니께서는 늘 톰보 연필, 사쿠라 물감을 준비해 주셨다. 그림 교재는 책과 패션 잡지였다. 할머니가 미군 PX에서 쓰는 카탈로그를 가져다준 적이 있다. 그 카탈로그에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수천 가지 물건이 들어 있었다. 초콜릿에서부터 보트, 믹서, 세탁기 등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정말 신기했다. 나는 그 물건들을 들여다보며 꼼꼼히 그려봤다. 그 물건들과의 대면은 내 상상력을 한껏 자극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대구 중심가의 만경관 극장 근처에 집이 있어서 극장 앞에서 늘 그림을 그렸다. 혼자 즐길 수 있는 유일한 놀이가 그림 그리기였다. 초등학교 때는 그림을 좋아했지만 선생님들의 칭찬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 내공이 터졌다. 학생 때 대단히 유명했다. 전국 실기대회에서 국회의장상, 내부부장관상, 문교부장관상 등 큰 상을 휩쓸었다. 고3 때 영남일보 후원으로 경북 문화공보관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실기대회 나가면 다른 학생들이 자기 그림은 그리지 않고 내 그림 그리는 걸 구경하곤 했다. 이런 유명세 때문에 결국 대학 들어가니까 교수도 우습게 보였다. 오만함이 작용하니 학교 생활이 문제였다.
______변종곤의 작품을 서양 미술사의 맥락에서 이야기할 때, 흔히 많은 논자들은 입체 작품의 경우 레디메이드나 아상블라주(assengblage) 같은 기법을 끌어들인다. 오브제와 오브제를 연결하는 조합은 작가의 의도적인 개입이 필요한 것이고, 그 개입의 과정이 곧 예술이다.변종곤은 오브제 조합에 마술 같은 전략을 구사한다.
변종곤 나는 그저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오브제가 모두 다 재미있다. 미국에 와서 사람들이 물건을 버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한국에서는 무연탄 말고는 버리는 걸 보지 못했다. 버린 물건들을 주워 하나하나 뜯어 봤다. 나는 시간의 흐름이 담겨 있는 물건을 좋아한다. 나는 오브제 하나하나에서 따뜻한 체온을 느꼈다. 주인한테 버림받은 이 오브제들은 얼마나 화가 날까? 그래서 오브제를 서로 결합해 봤다. 용도가 폐기된 오브제의 새로운 탄생, 그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었다. 나는 생명 탄생의 신비 같은 벅찬 감동을 느꼈다. 오브제는 생명체다. 그래서 여행할 때면 집에 있는 오브제한테 꼭 인사를 나누고 떠난다. 한 식구들처럼 친하게 지낸다. 그러니 집 안에서도 집 밖에서도 그저 재미있다. 버려진 것까지 이렇게 아름다워 보이니까 정신이 아주 건강해진다. 오브제에의 몰입, 이게 내 종교라면 종교다.
오브제의 결합, 새 생명이 탄생하다
______변종곤 작품의 요체는 오브제와 오브제의 결합, 아상블라주다. 그러면서도 변종곤은 그린다는 행위를 포기하지 않는다. 회화와 오브제가 만난다. 그래서 변종곤의 작품은 앙상블라주(ensengblage)라는 용어가 더 잘 어울린다. 그는 미술의 제왕인 회화의 혈통을 한 번도 버린 적이 없다.
변종곤 나는 시력이 아주 나빠 돋보기를 대고 그림을 그려야 한다. 큰 작품은 몇 달간 걸려 완성한다. 닮게 그리는 일은 아주 쉽다. 나는 그저 그림을 완성하는 수단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날 추스르는 방법으로 그림 그리기에 몰두한다. 힘들 때, 나를 스스로 보살펴야 할 때, 흐트러진 나를 다시 모아야 할 때, 나는 오브제 작업보다 그림을 그린다. 내가 사실 묘사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큰 행운이다. 사실적인 그림을 그릴 때는 머리털이 바짝 선다. 나를 들여다 보는 일, 요컨대 참선하는 일과 같다. 사람들은 내 그림이 완성도가 있기 때문에, 오브제도 완성도가 있는 것으로 좋게 평가해 준다. 나는 에어 브러시를 사용하지 않는다. 모두가 세필로 그리는 손 작업이다. 그린다는 건 미술의 고향과 같은 곳이다. 고향이 있어 나는 언제나 두렵지 않다.
______변종곤은 《뉴욕 타임즈》에 큰 기사가 여러 번 실렸다. 그는 뉴욕 화단에서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가. 그는 뉴욕의 소수 인종으로서 과연 주류미술의 어느 지점에 서 있는 것일까?
변종곤 뉴욕은 흑백논리의 세계만 통한다. 회색지대는 없다. 뉴욕에는 수많은 부자들이 거주하는가 하면, 수많은 빈민들이 살아가고 있다. 도시 경관은 흠잡을 데 없지만 지하도와 골목길은 먼지와 악취로 들끊는다. 그리고 모퉁이를 돌 때마다 색다른 인종적 색채와 분위기를 만난다. 그것은 죽느냐 사느냐의 투쟁이다. 거기서 느끼는 삶의 이중성, 아이러니, 극단성이 나에게 창작의 영감을 불어넣는 것이다. 물론 주류미술에 편입되기가 얼마나 어렵다는 것도 잘 안다. 그래도 지금까지 개인적인 노력으로 5개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30여년을 살았지만, 언제나 뉴욕은 타향이고 객지다. 그래도 개인적인 작품 발언은 언제나 중요하다. 가능성을 버릴 수는 없다. 이런 기운으로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다. 미국에서 나는 세금 잘 내는 만큼 큰소리치며 잘 살고 있다. 어깨 펴고 그림 그리는 사람이다.
“너무 아름답다.” “너무 재밌다.” 변종곤과 만나서 대화를 나누다 보면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는 그의 상용어. 나는 이 말의 진정한 의미를 사물에 대한 변종곤의 호기심이라고 이해하고 싶다. 사물에 대한 호기심이란 삶에 대한 호기심, 이 세계에 대한 호기심에 다름 아닐 것이다. 호기심은 채워지지 않는 결핍의 반응이 아닐까. 그 결핍이 채워도 채워도 결코 성이 차지 않는 변종곤의 창작 욕구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 예술적 표현의 결핍이야말로 그가 영원히 간직해야 할 덕목이 되어도 좋을 것이다.
사실 변종곤의 작품을 대할 때면 데페이즈망, 오브제 트루베, 아상블라주, 네오 다다, 인용, 혼성모방, 이종교배 같은 20세기의 미술용어가 정신 없이 머리 속을 스쳐간다. 그렇다. 어쩌면 그의 작품은 저 길고 긴 모더니즘의 진화와 포스트모더니즘의 혁신에 이르기까지의 온갖 미술사조가 모두 섞여 있는 일종의 형식적 혼성 혹은 ‘잡종성’, 그 시각적 충격 요법이라 요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변종곤은 그 충격 요법의 즐거움에 단단히 중독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변종곤은 그림이라는 전통의 표현 무기를 존중하고 고수하는 작가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그 오브제의 혼성에도 하나의 분명한 질서가 있다. 그것은 역동적 균형이랄까, 서로 대립되는 듯 보이면서도 결국 하나를 이루는 카오스모스, 요컨대 ‘혼돈으로부터의 질서’라 부를 만하다. 분명한 것은 변종곤의 작품 문법과 정신이 서구 미술의 문맥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변종곤의 거대한 ‘스튜디오 작품’이 1989년에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열렸던 〈대지의 마술사들〉 같은 전시의 기획 이념과 아주 유사하다는 확신을 가졌다. 이 전시는 지금까지 서양에 의해 억눌려 왔던 다른 문화의 문맥을 존중하고 타자의 언어를 이해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종래 프리미티비즘이나 민속미술품으로 규정했던 제3세계의 미술에, 서양의 현대미술과 완전히 등가(等價)의 시점을 제공한 획기적인 전시였다. 무엇보다 1990년대 ‘문화 다원주의’의 논의를 활짝 열었던 기념비적인 전시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바로 이 점에서 비평가들 사이에서 흔히 ‘현대 문명의 비평’이라 평가받는 변종곤의 작품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변종곤의 작품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문명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그는 문명의 정복자보다 피정복자의 목소리를 증폭시킨다. 동양인으로서 서구를 조롱하고, 버려진 물품의 생명을 되살려 현대 소비 문명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변종곤의 작품은 문명 ‘비판’뿐만 아니라 문명 ‘찬양’ 쪽으로도 문을 열어 두고 있다. 익살과 독설이 공존하는 ‘현대판 풍자화’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변종곤은 동양과 서양, 문명과 미개, 주류와 비주류 등등의 대개념을 어느 하나 절대 우위에 두기보다는 상대적 가치로 바라보면서, 마침내 그의 예술은 대개념 모두가 ‘아름답고’ ‘재미있는’ 세계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그리하여 변종곤은 동서고금과 시공을 가로지르며 이 세계 문명의 가치를 상대화하며 인류사를 다시 쓰고 있다. 절대 가치, 절대 진리에서조차 벗어나 ‘절대 자유’를 구가하는 예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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