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동해 문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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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ngel 댓글 0건 조회 375회 작성일 20-05-03 10:13본문
환동해 문명사
해양 사관으로 쓴 환동해의 문명, 그 장기 지속의 역사
『환동해 문명사―잃어버린 문명의 회랑』은 동해를 중심으로 하여 환동해권 지역의 문명의 부침과 교섭을 해양 사관을 통해 정리한 책으로, 국경이라는 인위적 경계와 국민국가의 제약을 넘어 유라시아의 ‘변방’인 환동해 영역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역사를 복원하고, 그들이 이루었던 문명의 현장과 그 교섭 양상을 기록한다. 그리고 환동해 문명이 여전히 ‘장기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저 : 주강현 (朱剛玄)
바다와 대륙을 잇는 열린 바다 환동해의 ‘액체의 역사’
이 책이 ‘동해 문명사’가 아닌, ‘환동해 문명사’인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이 책이 다루는 범위는 한국에서 ‘동해’라고 부르는 해역을 넘어선다. 환동해 해역은 한국, 북한, 러시아, 일본이 에워싼 ‘동해’, 홋카이도와 사할린의 해협 건너 오호츠크해, 캄차카 반도 너머 아메리카 대륙과 연결되는 베링해까지 이른다. 이 바다는 경계로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루트를 통해 망상(網狀)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동해부터 오호츠크해와 베링해까지의 바다를 환동해 문명사의 범위로 설정할 수 있는 것이다. 환동해 문명사는 바닷길을 통한 문명 교섭의 역사이기에 ‘관계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환’(環)은 북방에서 남방으로, 남방에서 북방으로 상호 교류하는 환상(環狀)의 관계와 소통을 의미한다. 동해는 호수 같은 바다지만, 여러 갈래의 길을 통해 바다와 육지를 연결한다. 환동해는 태평양으로 열려 있으며, 두만강 하구와 연해주 지역에서는 만주와 몽골 그리고 시베리아 등의 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다. 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환동해는 ‘열린 바다’이며, ‘열린 길’이다. ‘환동해’는 영토 개념이 아닌 ‘관계’와 ‘교류’, 그리고 해양 문명사로서 ‘액체의 역사’를 강조하는 것이다.
환동해를 향한 몽골의 장기 지속의 역사
저자 주강현은 몽골과 만주를 기점으로 중원을 포함하여 세계 제국으로 확장한 몽골의 원을 대륙 국가로만 한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원은 고려를 침략하여 복속시켰으며, 탐라(지금의 제주도)를 직접 관리하는 해양 제국으로서의 면모를 지니기도 했다는 것이다. 원이 연해주에서 환동해 루트를 통해 사할린으로 군대를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도 하다. 또한 일본을 정복하고자 했으나 가미카제(神風)를 만나 실패했다는 이야기는 익히 알려져 있다. 요컨대, 유라시아 대륙을 제패한 몽골 역시 환동해 권역으로 진출하여 해양 문명권과 지속적으로 교섭하고자 했다.
현재의 몽골(몽골인민공화국)은 내륙에 갇혀 있는(land-locked) 국가지만, 내륙을 연결하는(land-linked) 국가로 도약하는 데 사활을 걸고 있다. 러시아, 중국과 대륙철도로 연결하고, 기존의 황해 출구를 넘어 두만강 하구와 연해주 등의 환동해 출구를 열어 교역과 물류에서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는 중이다. 환동해를 향한 몽골의 역사는 장기 지속중이다.
만주는 유라시아 대륙과 해양세계를 잇는 오래된 문명의 회랑
청을 건설한 만주족의 시족인 여진족은 육지에서 농경 문화를 이루며 살아왔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11세기 고려와 일본의 역사에 동북 여진의 침략이 거의 같은 시기에 기록되어 있다는 점은 주목을 요한다. 1018년 동북 여진이 우산국(지금의 울릉도)을 침략했다는 기사가 『고려사절요』에 실려 있는 한편, 1019년 여진족으로 보이는 군도가 쓰시마섬을 거쳐 이키섬과 하카타, 마쓰라 지역을 초토화시켰다는 ‘도이의 난’(刀夷の亂)이 일본 사료에 남아 있다. 고려와 일본의 역사 기록으로 추정해보건대, 만주 지역에 살던 여진족은 두만강 하구와 연해주에서 동해 루트를 거쳐 울릉도와 일본을 드나들었다. 그리고 18세기 청의 강희제는 홋카이도와 사할린에 탐사대를 보내 북방 해양을 경략하고자 했다. 이는 일본만이 이 일대를 경략하려고 했다는 역사 인식에 새로운 논점을 던져준다. 청이 서진(西進)하여 거대한 대륙의 제국을 건설하고자 한 이면에는, 동북의 해양권 즉 환동해 권역을 향한 경략이 함께 있었다.
지금 중국에서도 낙후된 지역인 만주의 동북3성(헤이룽장성, 지린성, 랴오닝성)은 21세기 중국의 신성장 동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중국은 러시아에 의해 상실한 동해 출구를 차항출해(借港出海)를 통해 만회하고자 하는데, 두만강 하구와 북한의 나선항을 빌려(차항), 동해로 나아가(출해) 상하이와 닝보, 광저우 등의 중국 도시들에 닿으려고 한다. 이른바 중외중(中外中) 교역이라는 ‘중국 역사상 초유의 무역로’를 열고 있다. 이 차항출해는 21세기 중국의 국가 전략으로 제시된 일대일로(一帶一路)와도 연계된다. 동북3성에서 서진하면 중앙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육상 실크로드 벨트로 연결이 되고, 두만강 하구로 동해를 통해 남쪽의 중국 연안 도시에 닿으면 해상 실크로드 벨트로 연결이 된다. 만주는 유라시아 대륙과 환동해 해양세계를 잇는 오래된 문명의 회랑인 것이다.
러시아에게 환동해 네트워크는 중요한 지정학 요소
16세기부터 진행된 러시아의 시베리아 정복은 200여 년 만에 캄차카 반도와 알래스카 정복으로 종결된다. 유라시아-시베리아를 향한 차르의 동정(東征)으로 말미암아 러시아 군대가 동해와 태평양에 출현하게 되는데, 이는 대항해 시대의 결과로 유럽이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한 것만큼이나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었다. 청과 러시아의 국경 조약으로 인해 중국이 동해 출구를 상실하고, 러시아가 연해주 지역을 차지하여 현재의 국경이 되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후 20세기 초반 러시아의 환동해 영역에서의 남진과 일본의 북진이 충돌하여 일본과 러시아의 운명이 결정되었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러시아에게 환동해가 차지하는 지정학적 중요성은 이와 같았다.
냉전 종식 이후 중국과 러시아는 에너지 교류와 협력으로써 미일동맹에 맞서는 세를 과시하고 있다. 러시아에게 환동해 네트워크는 여전히 유라시아를 연결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지정학 요소이다.
환동해 문명사는 ‘작고 국가 없는 사회의 기록 없는 역사’
환동해 문명사를 논하는 데 있어 문명 간의 교섭은 국가 간 교섭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이는 환동해 영역이 다양한 소사회와 소민족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코사크 군대를 이끌고 시베리아를 침략하기 전에 시베리아에서는 원주민들이 원시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고, 연해주에서 캄차카에 이르는 환동해 해안 지역에서는 코랴크, 길랴크, 에벤, 에벤키, 우데게 등 소민족들이 어로와 수렵의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홋카이도와 사할린의 선주민은 일본인도 러시아인도 아닌, 아이누였다. 러시아와 일본 등 무력을 앞세운 국민국가가 이 지역으로 진출하기 전에, 동해와 오호츠크해, 베링해에 이르는 환동해 지역은 소사회를 이루고 살던 소민족의 삶의 터전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소사회의 존재 방식과 역사적 분화에 관한 분석은 환동해 문명사 서술에서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더군다나 “유라시아와 아메리카 북방의 문명 교섭은 소사회 동향 연구를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시베리아와 연해주, 캄차카 등지에서 환동해의 주인공은 소사회의 소민족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환동해 문명사가 유사무서(有史無書)의 조건에 놓이는 것은 소사회와 소민족이 다양하게 존재했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이 책의 저자는 ‘작고 국가 없는 사회의 기록 없는 역사’를 복원하는 것이야말로 환동해 문명사를 기술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중심’과‘변방’의 관계를 성찰케 하는 역사적 상상력을 부여
환동해는 다양한 원주민 소민족과 ‘오랑캐’로 불리는 유목 민족들이 융합적으로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유럽의 관점으로 보면 환동해는 극동에 위치한 변방의 바다지만, 이들에게 이곳이 변방이었을 리 만무하다. ‘아시아’라는 개념조차 유럽이 만들어낸 상상의 개념일 뿐이다. 동아시아의 관점에서 보면 ‘중심’과 ‘변방’은 중화적 세계 인식의 산물이다. 러시아가 말살한 시베리아와 캄차카 원주민의 문명, 근대 일본이 정복한 아이누의 문명, 중화에 의해 부인된 만주족과 무수한 유목 민족의 문명의 실체는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이 허구에 불과함을 말해준다.
환동해 해역에 다양한 ‘문명의 바닷길’이 있었다는 사실은 실크로드라는 육지의 문명 통로만을 강조하는 주류적 인식에 수정을 요구한다. 환동해는 담비의 길, 해삼의 길, 식해의 길, 곤포(다시마)의 길, 소그드 상인의 길, 기타마에부네의 길(일본 환동해 바닷길), 동해 울릉도 길, 일본로 등을 통해 대륙과 해양을 망상으로 연결하고 있었다. 그 자체로 ‘문명의 회랑’이었던 환동해는 대륙과 바다, 중화와 오랑캐, 유럽과 아시아, 문명과 야만, 국가와 소사회, 기록된 역사와 기록되지 않은 역사 등 ‘중심’과 ‘변방’의 관계를 성찰케 하는 또 다른 역사적 상상력을 부여한다.
이 책이 ‘동해 문명사’가 아닌, ‘환동해 문명사’인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이 책이 다루는 범위는 한국에서 ‘동해’라고 부르는 해역을 넘어선다. 환동해 해역은 한국, 북한, 러시아, 일본이 에워싼 ‘동해’, 홋카이도와 사할린의 해협 건너 오호츠크해, 캄차카 반도 너머 아메리카 대륙과 연결되는 베링해까지 이른다. 이 바다는 경계로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루트를 통해 망상(網狀)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동해부터 오호츠크해와 베링해까지의 바다를 환동해 문명사의 범위로 설정할 수 있는 것이다. 환동해 문명사는 바닷길을 통한 문명 교섭의 역사이기에 ‘관계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환’(環)은 북방에서 남방으로, 남방에서 북방으로 상호 교류하는 환상(環狀)의 관계와 소통을 의미한다. 동해는 호수 같은 바다지만, 여러 갈래의 길을 통해 바다와 육지를 연결한다. 환동해는 태평양으로 열려 있으며, 두만강 하구와 연해주 지역에서는 만주와 몽골 그리고 시베리아 등의 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다. 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환동해는 ‘열린 바다’이며, ‘열린 길’이다. ‘환동해’는 영토 개념이 아닌 ‘관계’와 ‘교류’, 그리고 해양 문명사로서 ‘액체의 역사’를 강조하는 것이다.
환동해를 향한 몽골의 장기 지속의 역사
저자 주강현은 몽골과 만주를 기점으로 중원을 포함하여 세계 제국으로 확장한 몽골의 원을 대륙 국가로만 한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원은 고려를 침략하여 복속시켰으며, 탐라(지금의 제주도)를 직접 관리하는 해양 제국으로서의 면모를 지니기도 했다는 것이다. 원이 연해주에서 환동해 루트를 통해 사할린으로 군대를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도 하다. 또한 일본을 정복하고자 했으나 가미카제(神風)를 만나 실패했다는 이야기는 익히 알려져 있다. 요컨대, 유라시아 대륙을 제패한 몽골 역시 환동해 권역으로 진출하여 해양 문명권과 지속적으로 교섭하고자 했다.
현재의 몽골(몽골인민공화국)은 내륙에 갇혀 있는(land-locked) 국가지만, 내륙을 연결하는(land-linked) 국가로 도약하는 데 사활을 걸고 있다. 러시아, 중국과 대륙철도로 연결하고, 기존의 황해 출구를 넘어 두만강 하구와 연해주 등의 환동해 출구를 열어 교역과 물류에서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는 중이다. 환동해를 향한 몽골의 역사는 장기 지속중이다.
만주는 유라시아 대륙과 해양세계를 잇는 오래된 문명의 회랑
청을 건설한 만주족의 시족인 여진족은 육지에서 농경 문화를 이루며 살아왔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11세기 고려와 일본의 역사에 동북 여진의 침략이 거의 같은 시기에 기록되어 있다는 점은 주목을 요한다. 1018년 동북 여진이 우산국(지금의 울릉도)을 침략했다는 기사가 『고려사절요』에 실려 있는 한편, 1019년 여진족으로 보이는 군도가 쓰시마섬을 거쳐 이키섬과 하카타, 마쓰라 지역을 초토화시켰다는 ‘도이의 난’(刀夷の亂)이 일본 사료에 남아 있다. 고려와 일본의 역사 기록으로 추정해보건대, 만주 지역에 살던 여진족은 두만강 하구와 연해주에서 동해 루트를 거쳐 울릉도와 일본을 드나들었다. 그리고 18세기 청의 강희제는 홋카이도와 사할린에 탐사대를 보내 북방 해양을 경략하고자 했다. 이는 일본만이 이 일대를 경략하려고 했다는 역사 인식에 새로운 논점을 던져준다. 청이 서진(西進)하여 거대한 대륙의 제국을 건설하고자 한 이면에는, 동북의 해양권 즉 환동해 권역을 향한 경략이 함께 있었다.
지금 중국에서도 낙후된 지역인 만주의 동북3성(헤이룽장성, 지린성, 랴오닝성)은 21세기 중국의 신성장 동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중국은 러시아에 의해 상실한 동해 출구를 차항출해(借港出海)를 통해 만회하고자 하는데, 두만강 하구와 북한의 나선항을 빌려(차항), 동해로 나아가(출해) 상하이와 닝보, 광저우 등의 중국 도시들에 닿으려고 한다. 이른바 중외중(中外中) 교역이라는 ‘중국 역사상 초유의 무역로’를 열고 있다. 이 차항출해는 21세기 중국의 국가 전략으로 제시된 일대일로(一帶一路)와도 연계된다. 동북3성에서 서진하면 중앙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육상 실크로드 벨트로 연결이 되고, 두만강 하구로 동해를 통해 남쪽의 중국 연안 도시에 닿으면 해상 실크로드 벨트로 연결이 된다. 만주는 유라시아 대륙과 환동해 해양세계를 잇는 오래된 문명의 회랑인 것이다.
러시아에게 환동해 네트워크는 중요한 지정학 요소
16세기부터 진행된 러시아의 시베리아 정복은 200여 년 만에 캄차카 반도와 알래스카 정복으로 종결된다. 유라시아-시베리아를 향한 차르의 동정(東征)으로 말미암아 러시아 군대가 동해와 태평양에 출현하게 되는데, 이는 대항해 시대의 결과로 유럽이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한 것만큼이나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었다. 청과 러시아의 국경 조약으로 인해 중국이 동해 출구를 상실하고, 러시아가 연해주 지역을 차지하여 현재의 국경이 되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후 20세기 초반 러시아의 환동해 영역에서의 남진과 일본의 북진이 충돌하여 일본과 러시아의 운명이 결정되었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러시아에게 환동해가 차지하는 지정학적 중요성은 이와 같았다.
냉전 종식 이후 중국과 러시아는 에너지 교류와 협력으로써 미일동맹에 맞서는 세를 과시하고 있다. 러시아에게 환동해 네트워크는 여전히 유라시아를 연결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지정학 요소이다.
환동해 문명사는 ‘작고 국가 없는 사회의 기록 없는 역사’
환동해 문명사를 논하는 데 있어 문명 간의 교섭은 국가 간 교섭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이는 환동해 영역이 다양한 소사회와 소민족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코사크 군대를 이끌고 시베리아를 침략하기 전에 시베리아에서는 원주민들이 원시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고, 연해주에서 캄차카에 이르는 환동해 해안 지역에서는 코랴크, 길랴크, 에벤, 에벤키, 우데게 등 소민족들이 어로와 수렵의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홋카이도와 사할린의 선주민은 일본인도 러시아인도 아닌, 아이누였다. 러시아와 일본 등 무력을 앞세운 국민국가가 이 지역으로 진출하기 전에, 동해와 오호츠크해, 베링해에 이르는 환동해 지역은 소사회를 이루고 살던 소민족의 삶의 터전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소사회의 존재 방식과 역사적 분화에 관한 분석은 환동해 문명사 서술에서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더군다나 “유라시아와 아메리카 북방의 문명 교섭은 소사회 동향 연구를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시베리아와 연해주, 캄차카 등지에서 환동해의 주인공은 소사회의 소민족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환동해 문명사가 유사무서(有史無書)의 조건에 놓이는 것은 소사회와 소민족이 다양하게 존재했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이 책의 저자는 ‘작고 국가 없는 사회의 기록 없는 역사’를 복원하는 것이야말로 환동해 문명사를 기술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중심’과‘변방’의 관계를 성찰케 하는 역사적 상상력을 부여
환동해는 다양한 원주민 소민족과 ‘오랑캐’로 불리는 유목 민족들이 융합적으로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유럽의 관점으로 보면 환동해는 극동에 위치한 변방의 바다지만, 이들에게 이곳이 변방이었을 리 만무하다. ‘아시아’라는 개념조차 유럽이 만들어낸 상상의 개념일 뿐이다. 동아시아의 관점에서 보면 ‘중심’과 ‘변방’은 중화적 세계 인식의 산물이다. 러시아가 말살한 시베리아와 캄차카 원주민의 문명, 근대 일본이 정복한 아이누의 문명, 중화에 의해 부인된 만주족과 무수한 유목 민족의 문명의 실체는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이 허구에 불과함을 말해준다.
환동해 해역에 다양한 ‘문명의 바닷길’이 있었다는 사실은 실크로드라는 육지의 문명 통로만을 강조하는 주류적 인식에 수정을 요구한다. 환동해는 담비의 길, 해삼의 길, 식해의 길, 곤포(다시마)의 길, 소그드 상인의 길, 기타마에부네의 길(일본 환동해 바닷길), 동해 울릉도 길, 일본로 등을 통해 대륙과 해양을 망상으로 연결하고 있었다. 그 자체로 ‘문명의 회랑’이었던 환동해는 대륙과 바다, 중화와 오랑캐, 유럽과 아시아, 문명과 야만, 국가와 소사회, 기록된 역사와 기록되지 않은 역사 등 ‘중심’과 ‘변방’의 관계를 성찰케 하는 또 다른 역사적 상상력을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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