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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열정으로 오른 명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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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inceton 댓글 0건 조회 1,292회 작성일 10-08-23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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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회 이끄는 1.5세 및 2세 재미한인들의 잘나가는 이야기
100년이 넘은 우리의 이민역사가 말해주듯 이제 미국 주류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활동하고 있는 한인들이 적지 않다. 이민 1세대 부모님들은 자녀가 미국에서 성장하고 공부해도, 소수인종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조건 ‘자격증’이 있는 전문기술직만을 고수했다. 하지만 이제는 많은 1.5 또는 2세대 코리안-어메리칸들은 미술, 음악, 영화,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야말로 “지독하게” 노력한 사람들이다. 그러면서도 중요한 것은 이들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과 한국이라는 두 개의 뿌리를 가지고 있는 이들 1.5세, 2세 한인들이 겪은 갈등과 도전적인 정신과 한국인 특유의 열정과 지치지 않는 노력들을 살펴본다. -편집자주


▲할리우드 속 한인 1.5세 배우 존 조
“열정만 있다면 문은 열린다”는 강한 의지로 적극 활동

발문:
할리우드에 아시안 배역 적지만 그런 상황에 더욱 고무되기도
1997년부터 30여 편의 할리우드 영화 및 TV 시리즈물 출연

“헤롤드와 쿠마”는 한 아시안이 주인공으로 발탁돼 화제를 모은 할리우드 영화다. 이 영화는 아시안 배우의 인상적인 유머감각과 풍부한 연기력으로 다시 한 번 주목을 받았다. 엉뚱하고도 유쾌한 웃음을 선사했던 주인공 ‘헤롤드 리’, 그가 바로 요즘 할리우드에서 끊임없는 러브 콜을 받고 있는 한인 1.5세 배우 존 조(한국명 조요한)이다. 존 조는 “American Pie”, “Better Luck Tomorrow” 등 1997년부터 지금까지 30여 편의 할리우드 영화 및 TV 시리즈물에 출연하며 할리우드 대표 한인 배우로 성장해왔다. 사실 할리우드에서 아시안에 대한 편견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에 대해 그는 “할리우드에는 아시안 배역이 별로 없다. 그러나 그런 상황은 나를 오히려 고무한다. 나를 좀 더 열심히 하게 만들고 자꾸 변화하게끔 한다. 만약 당신이 다른 사람의 집 거실의 작은 박스에 앉아서 그들을 웃게 한다면, 그들은 당신을 친구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존 조는 197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때 부모를 따라 LA로 이민와 LA 한인타운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글렌데일에 위치한 Herbert Hoover 고등학교 졸업 후 UC버클리 영문학과 재학시절 연극반 활동을 하면서 연기를 시작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아시안이 미국에서 배우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처음 배우 생활을 시작했을 때 중국계, 일본계 틈에서 “소수계 중에서도 소수계”라는 느낌에 위축되었던 것도 사실
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러한 ‘오해’는 여러 작품을 통해 주류 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배 아시안-아메리칸들을 직접 만나게 되면서
“열정만 있다면 문은 열리게 되어 있다”는 강한 의지로 변해갔다고 한다. 그는 한인 코미디언이자 배우인 마가렛 조가 그의 ‘영웅’이라고 소개했다.
존 조는 연기를 하면서 코리안-아메리칸으로 자란 자신의 학창시절과 미국 내 한인타운 속에서의 경험을 많이 끄집어낸다. 특히 LA 한인타운을 배경으로 한 2002년작 “Better Luck Tomorrow”에서 10대 문제아 역을 맡으면서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코리안-아메리칸으로서 혼란 속에 성장하면서 부모가 나에게 한국의 가치를 강요하는 것이 싫었지만, 어른이 되고 난 후에는 내가 코리안임을 점점 더 분명하게 느끼게 된다. 참 신기하다”고 고백한 바 있다. 지난 해 한국에서 개봉한 뉴욕한인타운배경의 ‘웨스턴 32번가’에서 살인사건을 파헤치는 한인 변호사로 열연한 후에는 “코리안 아메리칸이 한국 문화를 탐험하는 배역으로, 나의 경험과 닮아있어 흥미로운 점이 많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또 한인 또는 한인계 배우들과 연기를 한 것에 대해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있지만 같은 얼굴을 갖고 있다는 데서 심정적으로 좀더 가깝게 느끼는 연기를 해서 좋았다”며, “사실 할리우드에서 작업하다보면 나 혼자만 아시안인 경우가 많은데 배우가 모두 한인이라니 정말 특별했다. 형제애 같은 감정까지 느낄 수 있었다”는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제2의 타이거우즈’ 찬사 앤서니 김
뉴욕타임즈, “베테랑의 담대함과 루키의 무서운 열정 갖춘 선수”

발문:
부모에게서 남이 가지 않은 길 개척하고야 만다는 프런티어 정신 배워
“한국인 특유의 개척정신과 배짱으로 타이거를 잡는 라이언이 되겠다”

올 상반기는 프로 데뷔 2년 만에 생애 첫 PGA 우승을 차지한 앤서니 김(한국명 김하진)으로 한인사회가 후끈 달아올랐다. 자신의 이니셜을 딴 'AK'와 번쩍번쩍 빛나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버클을 허리띠에 달고, 우승이 확정되자 투우사처럼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김 군의 우승 사진이 연일 로컬신문과 한인신문 앞장을 장식하면서, 코리안-아메리칸의 저력은 그렇게 다시 한 번 미국사회를 흔들어놓았다.
1985년생인 앤서니 군은 LA에서 미주녹용을 운영하던 김성중 씨와 미령 씨 슬하에 외아들로 자랐다.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상당한 수준의 한국어 실력을 갖고 있으며 김치찌개를 좋아한다. 아버지의 권유로 기저귀를 차고 있을 나이인 두 살 때 처음으로 골프클럽을 잡은 그는 맨주먹 하나로 일군 ‘아메리칸 드림’의 전형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물론 그 뒤에는 전형적인 한인 부모의 희생과 교육이 있었다. 김군이 본격적으로 프로 골퍼의 꿈을 키우기 시작한 13세 때. 당시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한 대회에 참가해 화씨 110도를 웃도는 폭염 속에서 경기를 하던 앤서니는 더위를 견디지 못하고 구토를 하면서 포기 의사를 내비쳤다. 그 때 어머니는 앤서니에게 “네가 진정으로 프로가 되고 싶으면 100타를 넘게 쳐도 끝까지 경기를 마쳐야 된다”고 말했고, 결국 앤서니는 몇 차례 더 토하면서도 경기를 모두 끝냈다. 아버지의 스파르타식 훈련은 더 만만치 않았다. 연습을 게을리하면 가차없이 매를 들었다. 오버파 기록으로 우승한 아들의 트로피를 내던졌다는 것 역시 유명한 일화다. 아들이 골프에만 매진하도록 LA 시내의 집을 팔고 사막 지형인 라퀸타의 PGA 웨스트 옆으로 이사 가기도 했다.
김 군은 로컬 골프 전문지와의 인터뷰에서 “10대 때는 스파르타식 훈련을 고집하는 아버지와 잦은 마찰을 빚기도 했지만, 이는 나로 하여금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고야 말겠다는 프런티어 정신을 갖게 해줬다”고 밝혔다. 앤서니 김은 ‘제2의 타이거 우즈’라는 별명을 얻었다. 주류 언론도 그를 주목한다. 뉴욕타임즈는 앤서니를 두고 “베테랑의 담대함과 루키의 무서운 열정을 갖춘 선수”라고 극찬하며 “그의 플레이는 마치 타이거 같았다”고 평가했다. 또 “한때 성급하고 흥분을 잘 하는 어린 선수였지만 그러한 결점들이 침착한 집중력과 결단력으로 바뀌었다”고 강조했다.
“타이거를 잡는 라이언이 되겠다”며 재학중이었던 오클라호마주립대를 중퇴하고 2006년 프로로 전향한 한인청년은 이제 막 한국인 특유의 개척정신과 배짱으로 ‘대물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타임즈 선정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제프 한
학교 부적응 문제아에서 대형 멀티 터치스크린 개발자로
발문:
한인 부모들 자녀교육 강조하지만, 창의적인 교육 아쉬워 하고 싶어하는 분야 스스로 찾도록 동皐斂?격려해줘야
올해 타임즈 선정 ‘전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뽑힌 제프 한
(한국명 한재식) 씨는 공립학교 재학 시절 문제아였다. 1학년 때 6학년 시험을 통과했을 정도로 수학에 재능을 보였지만 획일적인 수업 방식에 적응하지 못해 항상 딴 짓을 하는 바람에 학교를 여러 번 전학 다녀야 했다. 코넬 대학 재학 중에는 사업을 하겠다며 덜컥 자퇴서를 제출해 또 한 번 부모의 속을 썩였다. 그러던 그가, 뉴욕 맨해튼에 ‘퍼셉티스 픽셀사’를 창업해 대형 멀티 터치스크린을 개발, 타임지가 선정한 영향력 있는 인물에 32세라는 젊은 나이로, 또 한인으로는 유일하게 이름을 올렸다.
역시, 그의 뒤에는 공립학교에 적응 못하는 아이를 사립 영재학교로 옮겨주고 사업을 위해 명문대를 그만두겠다는 아들의 뜻을 존중해준 아버지가 있었다. 한 씨는 “달톤 스쿨에서 고교 과정까지 마친 뒤 코넬대에 입학해 전기공학과 컴퓨터공학을 전공했지만, 대학 3학년 때 LA의 인터넷 업체로부터 동업자 제의를 받고 학업을 중단했다”며 “그 때도 아버지는 나를 믿는다며 격려해주셨다”고 말했다. 인터넷 업체는 직원이 2000명으로 늘어날 정도로 발전했고, 그는 6년 후 또 다른 비전을 찾아 뉴욕대 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겨 멀티 터치스크린 업체를 창업하기에 이른다. 한 한인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부모님은 항상 나에게 ‘한 가지를 알면 두 가지를 알려고 노력하라’, ‘무엇을 설명하려면 꼭 그림을 그려 설명하라’고 말씀하셨다”며 이는 멀티 터치스크린 개발에 큰 도움이 됐다고 밝혔다.
아버지 한동집 씨는 1969년 미국에 유학 와 같은 유학생이던 지금의 부인을 만나 결혼했으며, 20년간 식료품점을 운영하며 2남 1녀를 키웠고 6년 전 은퇴했다.
한인 사회에 관심이 크다는 제프 한 씨는 “한인 부모들은 자녀교육을 매우 강조하지만, 창의적인 교육이 아쉽다”며 “부모들은 아이들이 하고 싶어하는 분야를 스스로 찾도록 도와주고 격려해주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이어 그는 과학 분야로의 진출을 꿈꾸고 있는 한인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조언을 해주고 싶다고 인터뷰를 통해 밝혔다. “과학분야에 진출하려면 무조건 수학을 열심히 해야 한다. 예술 공부도 필수다. 창의력을 겸비하는 데 도움이 된다. 결국, 유능한 과학자는 일반인과 소통을 잘하는 사람이다. 아무리 획기적인 기술이라도 일반인이 이해하고 활용할 수 없다면 상용화, 대중화가 불가능하다. 그건 좋은 과학자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쿵푸팬더’의 스토리책임자 제니퍼 여 넬슨
‘한국인 특유의 섬세함과 집요함 갖춘 실력파’

발문:
주인공 ‘포’ 한인 스토리 아티스트인 제니퍼 여 넬슨 씨 손끝에서 탄생
10년전 드림웍스서 보조로 시작, 실력인정받아 총책임자 자리까지 올라

지난 달 개봉한 드림웍스의 ‘쿵푸팬더’는 지금 그야말로 애니메이션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중국을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는 ‘쿵푸 마스터’를 꿈꾸는 팬더 ‘포’의 이야기로, 갖가지 동양적인 요소에 탄탄한 스토리를 덧입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들은 사랑스럽고 익살스러운 ‘포’에게 빠져든다. 어느 새 친근한 캐릭터로 자리한 ‘포’. ‘포’는 바로 한인 스토리 아티스트인 제니퍼 여 넬슨 씨의 손끝에서 탄생했다. 넬슨 씨는 ‘쿵푸팬더’의 스토리 총 책임자(Head of Story)로, 이 영화의 스토리를 개발하고 시각화했다. 다시 말해, ‘포’라는 캐릭터가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지, 어떤 행동을 하고, 외모는 어떤지, 손짓이나 발짓은 어떨지를 구상하고, 전체적인 톤과 플롯을 개발한 것이다. 이는 이 작품에서 레이아웃 총 책임자로 함께 활약한 한인 전용덕 씨에 의해 더욱 빛을 발했다.
넬슨 씨는 한국에서 태어나 4세 때 이민해 롱비치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에서 일러스트를 공부했다. 이후 애니메이션 분야로 진출해 TV 애니메이션과 스토리보드 작업을 하다가 10년전 드림웍스에서 업무 보조로 일을 시작했고, 실력을 인정받아 총책임자 자리까지 올랐다. “스피릿”(Spirit/2002), “신밧드”(Sinbad/2003), “마다가스카”(Madagascar/2005) 등을 작업, 1999년에는 “Spawn”
으로 에미상을 수상하기도 한 그는 “한국인 특유의 섬세함과 집요함을 갖춘 실력파”로 인정받고 있다. 지금은 애니메이션 감독 데뷔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전 세계를 마당으로 한국인의 예술적 자질을 마음껏 발휘하고 있는 넬슨 씨는 “드림웍스 같은 회사들은 스탭을 선택할 때 출신배경이나 인종 등은 신경 쓰지 않고, 그 회사가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 얼마나 그 일을 좋아
하는지를 우선시한다”며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실력”이라고 강조했다.

▲미국 최초 한인교육감 ‘교육개혁가’ 미셸 리
월스트리트저널, ‘교육개혁의 창조적 사상가’

미셸 리의 교육개혁 핵심은 “공교육만으로 아이 훌륭히 키울 수 있다”
워싱턴DC 교육시스템의 관료주의 개혁, 교육정책의 초점을 학생에게로

뉴스위크는 지난해 말 '2008년 주목할 만한 인물'로 미셸 리(한국명 이양희) 워싱턴 DC 교육감을 선정하며 '벌을 삼킨 개혁가'라고 소개했다. 할렘파크 초등학교 교사 시절 초기 그는 유난히 시끄럽고 산만한 아이들을 뜻대로 통제할 수 없었다. 어느 날 벌 한 마리가 교실에 날아들었고 벌을 피하려는 아이들은 소란을 피웠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벌을 때려잡은 뒤 입에 넣고 삼켜버렸다. 그 후 아이들의 학습 태도가 좋아졌고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괄목할 만한 성적 향상의 출발점이었다.

지난 해 6월,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서는 30대 한인여성을 교육감으로 발탁하는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다. 지원예산은 미국 내 최고이면서도 공립학교 학업 수준은 최하위권에 머물며 대표적인 공교육 실패 지역으로 꼽힌 이 지역에서 학교 운영 경험이 없는 한인여성을 교육감으로 전격 발탁한 것이다. 이렇게 미국 최초의 한인 교육감이 미국의 수도에서 탄생했다.
미셸 리 교육감은 1970년 미시간주에서 태어나 오하이오주 톨레도에서 성장했다. 그의 부모는 1960년대 미국으로 이민한 한인 이민 1세대다. 자신의 부모의 교육에 대해 그는 “어렸을 적 부모님으로부터 교육을 잘 받았다. 교육의 가치를 잘 알았다고 말하고 싶다. 아버지는 특히 개방적이었고 공부에 대한 압박은 없었다. 교육적 압력은 성공적인 결과를 수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또 “남들이 뭐라고 해도 상관하지 않는 성격, 신념이 확실하면 밀고 나가는 추진력” 역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고 한다.
1992년 코넬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하버드대 케네디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한 그는 이후 볼티모어 빈민가의 할렘파크 초등학교 교사를 자원해 3년간 일했다. 그는 전국 하위 13% 수준이던 학생들 성적을 이 기간 동안 상위 10%로 올려놓았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1997년엔 우수교사 양성 프로그램인 '새 교사 프로젝트(Teach For America)'를 만들었고 현재까지 2만3000여 명의 전국 교사들이 이 과정을 연수했다. 그리고 TNTP(The New Teachers Project)를 설립해 교사를 양성하여 각 지역에 보내는 일과 뉴욕, 캘리포니아 등의 교육청과 함께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그는 ‘미국 최초의 한인 교육감’, ‘워싱턴 DC에서 40년만에 나온 비흑인 교육감’ 등의 타이틀과 함께 특히 언론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이 그를 ‘교육개혁의 창조적 사상가’라고 평한 것을 비롯, 본국의 SBS 방송은 ‘공부꼴찌 워싱턴 DC 미셸 리의 교육’이라는 제목으로 특별 프로그램을 구성해 방영하기도 했다. 또 얼마 전에는 워싱턴포스트가 미셸 리 교육감 공교육 개혁 1년 후 학생들의 성적이 10% 이상 눈에 띄게 올랐다고 보도했다.
그 이전, 할렘파크 초등학교 교사 시절에는 여러 교사들과 함께 가르치는 '팀티칭(Team Teaching)'을 통해 학생들의 성적을 크게 높여 ABC방송 '굿모닝 아메리카'에 소개된 적도 있다.
미셸 리 교육감의 교육개혁의 핵심은 “교육 개혁은 학생을 위한 것, 공교육만으로도 아이를 훌륭히 키울 수 있다”는 데 있다. 임명 직후 “워싱턴 DC 교육시스템의 관료주의를 개혁하고 교육정책의 초점을 최우선으로 학생들에게 맞추겠다”고 말해 ‘혁명적 변화’를 예고했었다. 약속은 곧 행동으로 옮겨졌다. 성적이 부진한 관내 공립학교 폐쇄 및 구조조정 등을 단행했다. 또 학교장의 30%를 교체하고 교육청 직원 100여 명도 해고했다. 교사노동조합과 학부모들이 가만있지 않았다. 그들은 매일 교육청 앞에 몰려와 시위를 벌였고 출근하는 그에게 물건을 던지기도 했다.

하지만 리 교육감의 거침없는 개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는 "아이들은 제대로 된 교육만 받으면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다. 모든 아이들은 훌륭한 학교에 다니기를 바란다. 이는 사회정의의 문제"라고 강조한다. 그의 개혁을 눈여겨 본 연방정부는 3,800만 달러를 워싱턴 DC의 교육예산으로 배정했고, 미국 최대 자선기관인 게이츠?멜린다 재단 등도 재정 지원에 나섰다.
리 교육감은 한 인터뷰에서 “코리안-아메리칸으로서 특별한 어려움은 없다. 또 코리안-아메리칸이라는 내 위치가 득이 될 것도 실이 될 것도 없었다. 다만 내가 이 조직에서 새로운 시스템을 이끌 첫 번째 코리안 아메리칸 출신 교육감이라는 것, 흑인이 대다수인 지역에서 내 인종적 배경이 그들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늘 자각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또 “교육감에 임명됐을 때 사람들이 한국계 미국인이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라고 의구심을 나타냈지만 이제는 그들이 내 역할에 대해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편, ‘좋은 학벌에도 불구하고 빈민가 교사직을 자원에 3년이나 활동한 이력이 특이하다’는 질문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 많은 교육가들의 마음을 정화시키기도 했다.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내 학력을 활용하는 게 가치 있는 일인 동시에 책임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교사의 자질은 수많은 어린이의 인생을 좌우할 만큼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게 사실이다. 교육이야말로 내가 배운 것들을 투자하는 최선의 방법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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