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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유대인 - 미국과 이스라엘을 연결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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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inceton 댓글 0건 조회 1,553회 작성일 10-08-07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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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유대인은 550만 명 정도로 미국 인구의 2%를 좀더 차지한다. 미국을 좌지우지하기에는 너무 적은 인구이다. 유대인들은 적은 인구이지만 금융계나 기업, 상업에 많이 종사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유대인이 미국 정치를 지배한다는 이런 관념이 자리잡았을까? 유대인은 미국 정계, 재계, 문화계에서 정상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아직도 이 리더십은 앵글로색슨 혈통의 서북유럽계 주류가 많이 차지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기업의 유능한 중간 관리자로서, 또 의사, 법률가, 교수, 예술인 등의 자유업에 많이 진출해 있다. 말하자면 유대인은 인구는 적지만 대부분 미국의 중산층과 문화계층에 속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기질적으로 진보적이어서 국가의 재원을 외교나 국방보다는 사회 복지에 쓰려고 하는 민주당을 주로 지지한다. 2000년 대선에서도 유대인의 80%는 민주당의 앨 고어를 지지했다. 그들은 사회 복지 지향적이고, 총기 소유를 반대하며, 여성의 임신중절권을 지지한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오랫동안 받았던 박해의 역사적 경험으로 소수민족의 인권 문제에 민감하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을 가진 유대인이 어떻게 미국정치에서 막강한 친이스라엘 로비를 펼칠 수 있는가? 한 마디로 말해서 그들은 개미군단적인 로비방법으로 이스라엘을 위한 일이라면 그들 사이에 있는 여러 가지의 차이를 넘어 한데 뭉쳐 자금지원을 아끼지 않아 왔던 데 있다.
AIPAC(미-이 섭외위원회, the American Israel Public Affairs Committee)는 유대인 로비 중에서 가장 강력한 조직으로써 6만 5000명의 회원을 갖고 있다. 이들은 이스라엘과 미국과의 군사적 관계를 밀착시키려고 한다. 이 외에도 유대인들의 로비 조직은 미국주요유대인단체연대,유대인민주당위원회, 유대인공화당연대 등을 위시해서 부지기수이다.
이 로비단체들은 탁월한 조직력으로 적극적 모금운동을 펼친다. 이 단체들이 움직이는 방법은 기부금을 내고 투표를 하고 정치가에게 편지를 쓴다는 미국에서 가장 기본적인 정치참여 행위를 통해서이다. 이 단체들은 쟁점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회원들에게 제공하면서 자기 구역 출신 의원에게 편지를 써서 의사표명을 하도록 권유한다. 그리고 그들의 의견을 지지하는 정치가들에게 자금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만일 어떤 후보자를 AIPAC이 친이스라엘이라고 정의하면 자금이 전국적으로 흘러 들어오기 시작한다.
거액 기부자들의 숫자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뭉칫돈 못지않게 중산층 개개인으로부터 집적되는 적은 기부금들이 로비자금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유대인은 그들 인구의 약 20%가 연 소득이 5만 달러 정도인 중산층이고 40%인 200만 명이 7만 5000달러 이상의 부유층이다. 미국 전체의 부유층은 총 인구의 10%를 이루는 약 2,500만 명이라고 추산되는데, 이들의 약 8~10%를 유대인들이 차지한다고 보면 된다. 유대인들은 예전부터 자기 민족을 위해 기부하는 문화가 배어 있다. 설문 조사에 의하면 약 10%의 유대인이 기부금을 내고 있다.
사실 유대인들은 80%가 팔레스타인의 자립을 규정했던 오슬로 협약을 지지하고 유대인 점령지에서의 이스라엘군 철수와 팔레스타인의 국가 수립을 지지하고 있다. 단지 이들 말없는 다수는 소수의 친이스라엘 로비와 같이 조직적으로 움직이지 않을 뿐이다.   
유대인의 미국 정착이 시작된 것은 1654년에 뉴암스테르담(뉴욕)에 23명의 유대인이 도착하면서 시작하였다. 이들은 스페인제국에서 이민 온, 세프라딤이라고 불리는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은 상업에 종사하였고, 미국 독립혁명기 즈음에는 시민권을 획득하고 관직의 임용에서 차별을 받지 않게 되었다. 그동안 유대인들은 유럽에서 거주지, 결혼, 토지소유, 직업, 시민권 등에서 차별을 받아왔다. 미국에서 유대인들은 유럽보다 차별을 덜 받으면서 그 인구가 조금씩 증가했다. 세프라딤의 뒤를 이어 아슈케나짐이라는 독일계 유대인들도 많이 들어왔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유대인들은 동유럽에서 대거 이민 왔다. 이것은 러시아의 알렉산더 2세가 유대인 무정부주의자에게 암살되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러시아에서는 유대인 추방령이 떨어졌고, 곧 동유럽의 국가들도 차례로 그들을 추방하였기 때문이었다. 1920년까지 250만 명의 유대인이 미국에 유입되었다. 이에 따라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미국에서도 일어나게 되었다.
이런 인종적 박해는 뉴딜정책을 편 프랭클린 루스벨트 행정부가 다문화주의를 표방하면서 점점 수그러들었는데, 그는 유대인인 루이스 브랜다이스를 처음으로 대법관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유대인이 미국 사회에서 더 이상 차별과 박해를 받지 않고 살 수 있게 된 시기는 2차대전 시 유대인이 홀로코스트를 겪은 후부터였다. 당시 서구인들은 새로 대두한 우생학과 인류학의 지원을 받는 인종주의를 과학적 인종주의라는 미명하에 신봉하고 있었다. 그리고 히틀러는 이런 인종주의적 신념을 토대로 유대인 말살정책을 수행했다. 그러나 그는 전쟁에서 졌다. 그리고 서구인들은 인종주의가 얼마나 사악한 일을 저질렀는가를 반성하게 되었고 이런 반성은 다문화주의를 확산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에서는 히틀러의 만행이 저질러지는 동안 유대인들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내면서 그들에게 난민의 지위를 부여하여 미국 유입을 용이하게 해주었다. 그 결과 현재 미국에는 이스라엘보다 많은 유대인이 거주하게 되었다.
유대인들의 높은 사회 진출도는 유대인의 높은 교육 정도에 기인한다. 성인 중 대학교 졸업자가 60%이상이나 된다. 그들은 워낙 도시에서 살던 사람들이기에 교육과 문화생활의 혜택을 많이 보았다. 유대인은 60년대에 흑인민권운동에 가장 열심히 참여했던 백인집단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흑인들은 유대인을 가장 싫어하는데 그것은 예전에 노동자로서 같이 일자리 경쟁을 하였으나 유대인들만 급부상하였고, 또 유대인들이 흑인 사회에서 돈을 벌었지만 백인촌에 거주하면서 그 자본을 흑인사회에 환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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