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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철학의 에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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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1,276회 작성일 10-08-03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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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이데아론은 플라톤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공헌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비록 불명료하고 불만족스럽기는 하지만, 그 이전에 있었던 다른 어떤 생각들보다도 매우 기발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Idea)는 근본적으로 불변이며 영원하고 비물질적인 본질로서, 우리가 보고 감각하는 현실적, 시각적 대상들은 단지 이데아의 조악한 모사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본원적인 삼각형의 형상(이데아)이 있어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삼각형은 단지 이데아로서의 삼각형의 형상이 비추어진 것이며, 이러한 비물질적인 실재로서의 이데아에 대한 플라톤의 이론은 당시 그리스 철학계에 있어 새로운 것이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이 실재(實在)를 몇 가지 종류의 물질적 재료들로 생각했던 반면에, 플라톤은 비물질적인 형상이나 이데아를 참된 실재로서 내세웠다. 이와 마찬가지로 소피스트들은 물질적인 질서가 항상 유동하고 변화한다는 이유에서 지식을 상대적이라고 생각했던 반면에, 플라톤은 지식을 절대적인 것이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사유의 참된 대상은 물질적 질서가 아니라 변화하지 않고 영원한 이데아의 질서이기 때문이었다.

  비록 개별적인 선(善)들을 판단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절대적인 선(善)이 존재한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이 이러한 견해를 예견하기는 했지만, 플라톤은 그 최고선(最高善)의 개념에 형이상학의 이론, 즉 실재의 전구조에 대한 설명과 그 속에서의 도덕의 위치에 대한 설명을 부가함으로써 소크라테스의 윤리적 관점을 뛰어넘었다. 더욱이 플라톤은 이 이데아론을 통해 일자(一者)와 다자(多者)간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설명을 할 수 있었는데, 이는 만물이 일자(一者)라는 파르메니데스의 결론과 만물은 유전(流轉)한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결론을 우회한 것이었다. 그는 수학에서 유래된 피타고라스적인 형상의 개념으로부터 도움을 받았으나, 그가 입안한 전혀 새로운 이론으로서의 이데아론은 그의 철학에 중심 개념이 되었으며 에센스가 되었다.

  이데아론은 존재의 본성을 설명하려는 진지한 시도를 보여 준 대표적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에 관한 의문을 일으키는 몇 가지 경험들을 갖고 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어떤 사물을 아름답다고 말하거나, 어떤 행동을 선하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사물과 행동에 관한 어떤 판단을 한다. 이는 우리가 판단하고 있는 사물과는 별도로 존재하는 선의 표준이 어디엔가 있음을 암시하며, 우리가 판단하는 인간 혹은 그 인간의 행위와 어느 정도 분리된 선의 기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더욱이 시각적인 사물들은 변화한다. 즉 그것들은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생겼다가 없어진다. 그것들의 존재는 덧없는 것이며, 일시적인 것이다. 그러나 사물들과 비교해 볼 때 선(善)이나 미(美) 같은 이데아들은 영원하며 항구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들은 사물들보다 더 많은 분량의 존재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플라톤은 실재적인 세계는 가시계(可視界)가 아니라 오히려 가지계(可知界)라고 결론을 내렸으며, 가지계(可知界)는 영원한 이데아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가장 실재적인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우리는 이데아에 관해 적어도 다섯 가지 정도의 질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 질문에 엄밀하게 대답할 수 없다 하더라도 플라톤의 많은 저술 속에 발견되는 그에 대한 응답을 통해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에 대한 대략적인 개관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1) 이데아(Idea)란 무엇인가?

  이데아란 영원한 패턴이며 우리에게 보이는 대상들은 단순한 모사들에 불과하다고 말함으로써 우리는 이미 이 질문에 대한 플라톤의 대답을 대신할 수 있다. 한 아름다운 인간은 보편적인 미의 모사(模寫)이다. 우리는 아름다움의 이데아를 알고 있기 때문에, 또한 인간은 많든 적든 그 이데아를 분유(分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 대해 그가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향연」에서 플라톤은 우리는 무엇보다도 어떤 특정한 대상이나 인물을 통해 아름다움을 파악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제한된 형태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후에 우리는 곧 한 형태의 아름다움은 다른 것과 유사하다는 사실을 체득하게 되며 따라서 우리는 한 특정한 물체의 아름다움으로부터 "모든 형태의 아름다움이 전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미(美)의 모든 양태들은 어떤 유사성을 갖는다는 이러한 발견의 결과로 아름다운 대상에 대한 인간의 집착은 완화되면서 아름다운 물질적 대상으로부터 미의 개념에로 옮겨가게 된다.

 플라톤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미의 이러한 보편적 성질을 깨닫는다면 "한 가지 아름다움에 대한 그의 극렬한 사랑은 시들 것이고 그는 그것을 사소한 일이라고 간주할 것이며... 모든 아름다운 형상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다음 단계로 그는 정신적인 미가 외형적인 미보다 훨씬 숭고한 것임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 다음에 그는 미의 광활한 바다로 들어가 그 속에서 사색하면서 지혜에 대한 무한한 사랑 가운데 참되고 고귀한 사상들과 생각들을 수없이 창조해 낼 것이다. 해안에 도달할 때까지 그는 점점 더 성장하고 강해져 결국 그의 시야에는 단 하나만의 학문이 펼쳐질 것인즉, 이것이 다름 아닌 미의 학문인 것이다." 플라톤은, 아름다운 사물들은 그것들의 다양성 속에서도 모든 미의 근원인 미의 이데아를 지향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 미의 이데아는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객관적인 실재(實在)를 갖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미의 이데아는 모든 아름다운 대상과 같이 생멸하는 실재성이 아니라 움직이며 변화하는 사물들과 별도의 존재성을 갖고 있는 항구적 실재라는 것이 플라톤이 말하는 실재하는 형상으로서의 이데아이다.

 「국가론」에서 플라톤은, 진정한 철학자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사물의 본성에 대한 인식이라고 말한다. 그는 무엇이 정의(正義)인가 혹은 무엇이 미(美)인가를 물을 때 정의롭고 아름다운 사물의 예를 원하지 않는다. 그가 알기를 원하는 것은 무엇이 이 사물들을 정의롭고 아름답게 만드느냐는 점이다. 속견과 지식의 차이는 바로 이것이다. 속견의 수준에 있는 자는 정의로운 행동을 알 수는 있지만 왜 그것이 정의로운가를 말할 수 없다. 그는 그 특정한 행동이 분유(分有)하고 있는 정의의 이데아에 대한 본질을 알지 못한다. 지식은 단순히 일시적인 사실들과 현상들, 즉 생성의 영역에 관련되지 않는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 존재(being)를 지닌 것은 사물의 본성이며 보편미나 보편선과 같은 본질들은 우리가 사물들이 선하다든가 아름답다는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것들은 영원한 형상, 원형들 혹은 이데아들이다.

  플라톤은 미와 선의 이데아 외에도 다른 이데아들이 많이 존재한다고 하였는데, 침대의 이데아에 관해서도 언급하면서 우리가 보는 침대들은 단순한 모사들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과연 본질들 혹은 본질적 속성들이 존재하는 수만큼 많은 이데아들이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을 낳게 한다. 비록 플라톤이 개(犬), 물(水), 그 밖의 다른 사물들의 이데아가 존재한다고 확언한 바는 없지만 「파르메니데스」편에서 그는 진흙과 먼지의 이데아들은 확실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만일 모든 유(類)의 사물들 배후에 이데아들이 존재한다면 일종의 중첩된 세계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얼마나 많은 이데아들이 존재하는가 또는 어떤 이데아들이 존재하는가를 세밀히 밝히려 할 때 이러한 난점들은 증가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이 이데아를 통해 의도했던 바는 명백하다. 그는 이데아들은 영원한 존재를 가지며 감각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신에 의해 파악되는 사물의 본질적인 원형(原形)이라고 생각했다. 이데아는 "무색, 무형의 만질 수 없는 실재적 존재"이기 때문에 이데아는 오직 그를 바라볼 수 있는 정신, 즉 "지(知)를 통해서만 볼 수 있다."는 것이 플라톤의 생각이며 이는 흔들이지 않았던 그의 신념이기도 하였다.



2) 이데아들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만일 이데아들이 정말 실재하며 존재를 체현(體現)하는 것이라면, 그것들은 어디엔가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비물질적인 형상(이데아)들이 위치를 가질 수 있을까? 그것들이 공간상에 자리잡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플라톤의 명쾌한 제안은 이데아들은 구체적인 사물과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즉 그것들은 우리가 보는 사물들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한다. '떨어져', 혹은 '분리되어' 존재한다는 것은 이데아들이 하나의 독립된 존재를 갖는다는 사실을 의미함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비록 특정한 사물들이 사라진다 해도 계속 존재하는 것이 된다. 이데아들은 차원(次元)을 갖지 않는다. 그것들의 위치에 관한 의문은 이데아들도 어떤 존재이므로 공간상에 위치해야 한다는 우리의 언어의 결과이다. 이데아들은 독립된 존재를 갖는다는 사실 이외에는 그들의 위치에 관해 언급할 수 있는 말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두 가지 부가적 방식으로 플라톤에 의해 이렇게 강조된다.


  첫째로 그는 영혼의 선재론(先在論)과 관련하여 인간의 영혼은 육체와 결합되기 이전에 이미 이데아들과 친숙했다고 말한다. 둘째로 창조의 과정에서 데미우르그(Demiurge), 즉 신은 특정한 사물들을 만들어내는 데 이데아를 사용했으며 이는 형상들이 사물에로의 체현(體現) 이전에 이미 존재를 가졌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더욱이 이 이데아들은 "신의 정신" 속에 혹은 "합리성의 최고인 일자(一者)" 속에 존재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형이상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들은 다른 모든 사물의 본질의 원인이며, 일자(一者)는 형상들의 원인"이라고 말하였다 플라톤의 분리된 선(線)의 비유를 다룰 때 우리는 어떻게 플라톤이 가장 낮은 허상의 단계로부터 가장 높은 단계 -선의 이데아가 실재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내포하는- 에로 이르는 정신의 여행을 추적했던가를 보았다. 또한 동굴의 비유에서 태양은 동시에 빛과 삶의 근원이었던 것처럼, 선의 이데아는 "아름답고 올바른 모든 사물의 보편적 창조자이며 현세에 빛을 낳아준 부모이고, 한편 진리와 이성의 근원이다"라고 플라톤은 말한다. 실제로 형상들이 신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가는 하나의 의문이다. 그러나 이데아들은 중개자이며 그것을 통해 이성의 원리들이 우주 속에서 작용한다고 말하는 것은 플라톤이 의도했던 것처럼 보인다.


     3) 이데아와 사물의 관계는 어떠한가?

  한 현상은 세 가지 방식으로 한 사물과 관련되며 이는 동일한 사항에 관해 언급하는 세 가지 방식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첫째로 이데아는 사물의 본질의 원인이다. 둘째로 한 사물은 하나의 이데아를 분유한다고 말할 수 있다. 셋째로 한 사물은 하나의 이데아를 모방하거나 모사(模寫)하는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각각의 경우에서 플라톤이 암시하고 있는 바는 비록 이데아가 사물로부터 분리되어 있고, 인간의 이데아는 소크라테스와 다르지만 모든 구체적, 현실적 사물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존재를 이데아에 의탁하고 있으며 이데아를 얼마간 모방하거나 모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형상)와 질료(質料)가 분리될 수 없으며 실재적인 선과 미는 현실적인 사물들 속에서만 발견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플라톤은 사물들과 그것들의 이데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설명으로서 단지 분유(分有)와 모방만을 허용하였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혼돈(chaos)은 이데아에 의해 질서화된다는 주장에 의해 강조되었으며, 이는 이데아의 실재와 질료의 실재가 분리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플라톤 비판은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면 현실적인 사물들과 분리된 이데아의 존재를 설명하는 어떤 일관된 방식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플라톤은 만일 정신이 불완전한 사물 이외의 다른 어떤 것에도 접근할 수 없다면, 어떤 것의 불완전성에 관한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반문할 것이다.


     4) 이데아들간의 관계는 어떠한가?

  플라톤은 "우리는 이데아들을 함께 엮음으로써만 언동을 행할 수 있다"고 하였다. 사유와 논의는 대부분의 경우 특정한 사물들을 초월한 수준에서 진행된다. 우리는 사물들이 현시하는 본질이나 보편자들의 용어로 이야기하며 그러한 방식으로 일반적인 개체명사들, 여왕들, 개들, 목수들에 관해 언급한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사물들의 정의이며, 따라서 보편자들 혹은 이데아들이라고 할 수 있다. 확실히 우리는 경험을 통하여 어둠, 아름다움, 인간 등등의 구체적 사물들에 관해 언급한다. 그러나 우리의 언어는 이데아와 이데아를 관련시키는 일을 한다. 우선 동물의 이데아가 존재하며 그것의 속류(屬類)들로서 인간과 말(馬)의 이데아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데아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단일성을 지니면서도 서로 얽혀 있다. 동물의 이데아는 말의 이데아에도 나타난다고 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하여 한 이데아는 다른 이데아를 공유, 또는 분유(分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재의 구조를 나타내는 이데아들의 위계 질서가 존재하며 그 가운데 가시계는 단지 하나의 반영에 불과할 뿐이다.

  이 이데아의 위계질서의 하부로 내려가면 갈수록 마치 "빨간 사과들"에 관해 언급할 때처럼 점점 더 시각적 대상들에 가까워지며, 구체적 대상이 되는데, 따라서 지식은 점점 더 보편적일 수 없게 된다. 반대로 위로 올라가면 갈수록 이데아는 점점 더 추상적이 되며 -예를 들면 일반적인 사과에 관해 언급할 때처럼- 지식은 점점 더 넓어진다. 과학은 가장 추상적이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이유에서, 즉 그것은 특정한 경우들과 특정한 사물들로부터 그러한 독립성을 획득했기 때문에 그것은 최고 형태의 지식을 소유하는 것이다. 하나의 장미로부터 보편적인 장미로, 더 나아가 보편적인 꽃으로 진행하는 식물학자는 특정한 것들로부터 일종의 추상화와 독립을 획득해 온 셈이며, 이는 플라톤이 말하려 했던 것과 일치한다. 그렇지만 이는 플라톤이 모든 이데아들을 서로서로 관련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의 의도는 단지 모든 의미 있는 명제는 몇몇 이데아들의 사용을 나타내며, 지식은 적합한 이데아들의 상호 관계에 대한 이해로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싶어 한 것이다.


    5) 우리는 어떻게 이데아들을 인식하는가?

  플라톤은 정신이 이데아들을 발견하는 방식을 최소한 세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로 상기(想起)의 방식이다. 영혼은 육체와 결합되기 전에 이미 이데아들과 친숙했었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들의 정신이 존재의 선험적(先驗的) 상태에서 인식했던 것을 상기한다. 가시적인 사물들은 인간들에게 이미 알고 있던 본질들을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플라톤에게 있어 교육은 상기의 과정인 것이다. 둘째로 인간은 변증법적 활동을 통해 이데아의 인식에 도달하게 되는데 변증법이란 사물들의 본질을 추상화하는 힘이며, 지식의 모든 부분들의 상호 관계를 발견하는 힘이다. 셋째로 갈망의 힘, 즉 사랑(eros)이 존재하는데 이것은 플라톤의 「향연」에서 서술했던 대로, 인간을 아름다운 대상으로부터 아름다운 사유에로, 더 나아가 미의 본질 바로 그 자체에로 단계적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영원하고 항구적이며 보편적인 이데아의 세계를 이해하고 또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본래 친숙했던 이데아를 정확하고 합리적인 정신에 입각하여 다른 많은 것을 희생하면서까지 얻고자 노력하는 빈곤의 자식이 지닌 욕망에 우라니아적(고귀한) 사랑의 정성이 깃들여지면 인간은 충분히, 그리고 완연하게 최고지의 단계에 도달하게 되며, 그리고 그는 어두운 동굴에 족쇄에 묶여 살던 과거에 대해, 동료들에 대해 연민을 지님과 동시에 그 무지를 일깨우는 일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난점들뿐 아니라 많은 의문들을 남겨 놓고 있다. 플라톤의 말에 따르면, 두 개의 분리된 세계가 존재한다는 인상을 받지만 이들 세계들간의 관계를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 이데아와 이에 상응하는 대상들의 관계는 우리가 바라는 만큼 그렇게 명료하지 못하다. 그렇지만 그의 주장은 매우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는데 특히 그가 가치 판단에 대한 우리의 능력을 설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한 사물이 더 좋다든가 더 나쁘다는 표현은 그 가치 평가를 받고 있는 개체적 사물들 속에 존재하지 않는, 다른 어떤 규준이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이데아론은 과학적 지식을 가능하게 한다. 왜냐하면 과학자들은 실로 현실적인 가시적 개별자들을 초월해서 본질이나 보편자들, 즉 법칙들을 다루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법칙들을 정식화(定式化)하며 이 법칙들은 우리에게 순간적이며 특정한 사물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물들에 관한 어떤 것을 말하려 한다. 비록 이 이데아론의 전체계는 궁극적 실재란 비물질적이라는 플라톤의 형이상학적 관점에 의존하고 있지만 그것은 결국 어떻게 우리가 일상적 담화를 할 수 있는가 하는 보다 단순한 사실에 대해 설명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인간들간의 모든 행위들은 개별적 사물들로부터 우리가 독립해 있음을 설명해 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의 표현에 따르면 대화(언어)는 우리를 이데아에게로 이끄는 단서이다. 왜냐하면 대화는 보는 것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눈은 단지 특정한 사물만을 볼 수 잇지만 대화에 생명을 불어넣는 사유는 보편적인 것, 즉 이데아를 "파악"함으로써 특정한 사물들을 떠나 추상화된다. 결국 플라톤의 이론에는 비록 그 이론이 불확정적으로 끝나긴 했지만 부정할 수 없는 매력이 있는 셈이며, 그 매력이 오랜 동안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게 된 이유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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