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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철학 6편: 이슬람 철학과 유태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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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2,665회 작성일 10-08-03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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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중세 철학자들은 철학과 신학을 동일한 목적을 강구하는 테제로 삼았다. 이와 같은 태도는 주로 철학을 신학의 한 구성 요소로 본 기독교도들로부터 연유한 것이었다. 그들의 종교적인 태도는 이미 오래 전 철학의 주류를 형성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에서 비롯되었으며 따라서 대부분의 경우에 중세 철학자들은 행위와 사유 모두 기독교적 관점에 구속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비록 중세라는 같은 시간대에 머물러 있었을지라도 철학은 매우 다양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장소에 따라 철학은 전혀 다른 해석을 요구하기도 하며 그러한 경향을 다른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이들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세의 철학은 대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의존하고 있었다. 문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전하는 중요한 주석의 대부분이 이슬람 학자들에 의해 저술된 것이라는 데 있었다. 따라서 중세의 서구 학자들은 이슬람 주석가들이 전해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재해석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이들의 주석은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지식의 원천인 동시에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키는 데 있어 심각한 어려움을 야기하는 원인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철학과 신학을 융화시키려 노력하는 스콜라 철학자에게 이성과 신앙을 별개의 문제로 다루는 철학은 그들의 용도와 다른 것이었으며, 그들은 각기 다른 지대에서 벌목한 철학을 자신의 철학적 토대를 구축하고 건축하는 데 사용하기 위해 부당한 전용(轉用)을 꺼리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 철학의 학문적인 전통은 이슬람과 아라비아 경역의 학자들에 의해 보존되고 있었으며, 그들이 아니었다면 고대의 철학은 유럽으로 온전히 전해질 수 없었다. 따라서 [철학과 삶] 서양철학사의 한 장을 떼어 고대 철학을 온전히 보존하는 데 공헌한 이들에게 바치는 일도 무의미하지 않으리라 본다. 분명한 것은 당시 중세 이슬람 철학과 유태 철학은 변방의 철학이 아니었다.





1. 이슬람 철학

모하메드와 우마르 1세의 영도하에 건설된 이슬람 제국은 9세기에서 12세기에 걸쳐 철학적 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났고, 페르시아와 스페인에 중심을 둔 거대한 모슬렘 제국의 기초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 모슬렘 세계에는 기독교 세계보다 그리스 철학, 과학 및 수학에 관한 지식이 더욱 진보하였다. 더구나 모슬렘 세계는 서구 유럽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요 저서들을 입수하기 수세기 전에 이미 그것들을 접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리스 철학자들의 많은 저서가 아랍 어로 번역된 이후에야 서구에 라틴 어로 된 그리스 철학이 번역되었으며, 이에 따라 그들의 그리스 철학은 면밀한 의미에서 아랍 철학에 의해 채색된 철학이었다. 모슬렘의 철학은 833년에 이미 바그다드에서 잘 정립되었으며 그곳에는 철학과 과학에 관한 그리스 어 원본들을 번역하고 창조적인 학자를 양성하기 위한 학교가 설립되었다. 뛰어난 사상가들, 특히 아비켄나(Avicenna 980~1037)는 그렇게 설립된 학교에서 배출되었으며, 모슬렘의 다른 중심지인 스페인의 코르도바에서는, 또 다른 대표적인 철학자인 아베로에스(Averroes)가 그의 저서의 대부분을 저술하였다. 아비켄나와 아베로에스가 아랍 어로 저술을 하는 모슬렘 교도이긴 하였지만 그들은 아랍인은 아니었다. 아비켄나는 페르시아 인이었고, 아베로에스는 스페인 인이었다. 그들은 당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대한 권위 있는 주석을 내놓았고, 이것들은 기독교 학자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를 접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이었다.

이들의 주석을 통하여 전해진 아리스토텔레스는 기독교의 교의와 일치되지 않으므로 보나벤투라와 같은 이들은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거부해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하였다. 반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베로에스의 견해를 반대하는 파리 대학의 대표적인 철학자 시게르 폰 브라반트(Siger von Brabant)와 논쟁을 벌였을 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다른 주석서들도 가까이 하였다. 물론 브라반트와 벌인 아퀴나스의 논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를 기독교의 교리에 부합되게끔 재해석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아랍 철학자들의 중요성은 다음의 두 측면에서 평가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그 밖의 그리스 철학자들을 서구로 유입시킨 전달자였으며, 두 번째로 그들은 중세 철학에 있어 논쟁의 근거가 된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서의 초기 저자들인 동시에 가장 권위 있는 지식보급자였다는 점이다.


a) 아비켄나(Avicenna, 아랍 명은 Ibn Sina)

980년 페르시아에서 태어난 아비켄나는 어렸을 때부터 뛰어난 학자적 기질을 발휘하였다. 그는 기하학, 논리학, 법률, 코란, 물리학, 신학 및 의학을 공부하였으며, 16세에 의사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많은 저서를 통해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자신의 사상을 소개하였지만 그의 사상 가운데 신플라톤주의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 특히 중요한 것은 아비켄나의 창조론에 대한 견해였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신플라톤주의의 견해를 결합하여 13세기에 격론의 대상이 된 이론을 정립하였다. 그는 다음의 가정, 즉 존재하게 되는 것은 (일반적으로 경험되는 사물의 경우이다.) 무엇이든지 원인이 있어야 한다는 가정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원인을 가져야만 하는 사물을 그는 가능한 존재라 불렀다. 가능한 존재의 원인은 선행하는 존재에 의해 야기되어야 하는데 이것 역시 원인을 가져야 하지만 그러한 원인의 서열은 무한히 계속될 수는 없다고 지적하였다. 그렇다면 원인을 갖지 않은 제 1 원인이 존재해야만 하며 그 존재는 단순히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필연적(necessarium)인 동시에 어떠한 원인에서 비롯되지 않고 자체적으로 존재를 소유하는 무엇인 바, 이것이 아비켄나에게는 곧 신(神)이었다. (후에 아퀴나스는 세 번째 증명에서 이러한 추론 형식을 도입하였다.) 신은 존재의 최고를 이루며 시초를 가지지 않고 항상 행위하고 있다. 즉 항상 그의 충만한 존재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항상 창조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비켄나에게 있어 신의 창조, 또는 창조적 행위는 필연적이고 영원한 것이었다.

그러나 13세기 보나벤투라는 이러한 결론을 심각한 오류라고 생각하였으며 또한 성서의 창조 개념과 어긋난다고 비판하였다. 성서에서는 창조를 필연이 아닌 신의 자유의지의 소산으로 보고 있으며, 영원에서가 아닌 시간 속의 어떤 한 지점에 창조가 일어났다고 기술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철학적으로 창조가 시간 안에서 혹은 영원으로부터 일어났는가의 여부는 가릴 수가 없으며, 그것은 궁극적으로 신앙의 문제이어야 한다는 데 표를 던졌다.

기독교 철학자들이 아비켄나의 형이상학에 있어 그의 창조론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면 그의 심리학은 더욱 심각한 어려움을 주었다. 심리학에서 그는 특히 인간의 지적인 활동을 설명하고자 하였는데, 그의 이론에서 다룬 중심 문제는 가능한 지성과 매개적 지성의 구별에 관한 것이었다. 이 차이점을 설명하기 위해 아비켄나는 존재의 등급에 관한 신플라톤주의적 견해를 도입하였다. 그 등급에서 인간은 천사의 존재 혹은 지성(intelligence)의 단계 중 최하위에 위치하는 존재라고 주장하였다. 말하자면 신은 단일한 결과를 창조하며 그 결과가 최상의 지성인 천사라 불리우고 이어 이 지성은 하급의 지성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이 창조의 서열을 따라 내려가며 아홉 개의 지성이 존재하는데, 각각의 지성은 순서대로 위의 것이 아래의 것과 연속적인 지성을 창조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아홉 번째 지성은 열 번째이자 마지막인 지성을 창조하며 이것이 바로 매개적 지성(intellectus agens)이다. 세계의 4원소 및 인간의 각 영혼을 창조하는 것이 이 매개적 지성이라 하였는데, 매개적 지성은 인간의 영혼이나 정신뿐만 아니라, 이들 창조된 정신에게 “형상들을 부여하는 자(dator formarum"라고 하였다.

아비켄나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 사람의 정신은 시작을 가지기 때문에 그것은 가능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가능한 지성을 소유한다. 여기에서 아비켄나는 존재와 본질을 현저하게 구별하고 있으며 또한 피조물 내에 두 가지 다른 사물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말하자면 피조물의 본질은 그의 존재와 구별되기 때문에 그의 본질이 저절로 충만되지 않으며, 또 자체적으로 존재가 주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의 본질은 인식하는 데 있지만, 그것이 항상 인식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지성은 인식할 수 있고, 그것의 본질도 인식하기는 하지만, 그것의 인식 행위는 가능할 뿐이다. 그에 의하면 지성은 현실적으로 어떠한 지식도 아닌 지식의 본질 혹은 그 가능성을 가지고 창조되었다고 한다. 인간의 지성에 내재하는 지식의 존재는 다음의 두 가지 요소를 소유해야 한다고 그는 기술하였다. 즉 1) 외부적으로 우리가 감각 가능한 대상을 지각하게 하는 육체적 감관과 내부적으로 기억 혹은 상상 안에 있는 대상들의 상(像)을 보유하는 힘. 2) 추상의 힘을 통해 개별 사물에 내재하는 본질 혹은 보편자를 발견하는 힘이 그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아비켄나의 독특한 점이 있다. 즉 이 추상은 인간의 지성이 아니라, 매개적 지성에 의해 수행되며 그 지성은 인간의 정신이 인식할 수 있도록 조명해 주고, 따라서 정신의 본질에 존재를 부여해 준다는 것이다. 매개적 지성은 모든 인간의 정신의 창조자이며 인간의 지식 속의 능동적인 힘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 안에는 그들이 분유(分有)하고 있는 유일한 능동적 지성(intellectus activus)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시게르 폰 브라반트가 파리 대학에서 가르쳤던 심리학에 대해 보나벤투라가 지대한 관심을 보인 것은 그것이 각 사람의 불연속적인 개별성의 개념을 위기로 몰아넣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비켄나는 그러한 개념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현실적으로 각 영혼은 그것의 원천인 매개적 지성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영혼 불멸설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독교의 학자들은 매개적 지성론 속에 인간과 신 사이의 심각한 분리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영혼의 소멸을 찾아보려고 하였다. 왜냐하면 신이 아닌 매개적 지성이 인간의 지성 위에 조명을 비추어 주기 때문이라고 아비켄나는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질이 그의 육체로 화할 때만 개별적인 인간이 존재하며 인간의 정신은 그렇게 개별화된 육체의 형상(形象)에 불과할 뿐이라고 그는 주장하였으나, 그러나 지성의 능동적인 역할은 그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식으로 아비켄나는 중세 철학에 다음과 같은 자극적인 난제를 던져 주었다. 즉 1) 창조의 필연성과 영원성 2) 존재의 등급의 순서와 유출 3) 인간의 영혼을 창조하고 가능한 지성을 조명해 주는 매개적 지성론 4) 가능하고 필연적인 존재와 연관된 본질과 존재간의 구별이 그것이다. 아비켄나는 중세 철학과 신학이 서로 모호한 얼굴로 모호한 지점에서 모호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을 때 일정한 얼굴로 일정한 지점에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이유를 처음으로 제시한 학자였다.


b) 아베로에스(Averroes 아랍 명은 Ibn Rushd)

아비켄나와 더불어 아베로에스는 탁월한 학자였다. 그는 1126년 스페인의 코르도바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철학, 수학, 법률, 의학 및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판사로 복직한 후 의사가 되었으나 대부분의 시간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주석을 저술하는 일에 바쳤다. 그 때문에 그는 중세 대표적인 아리스토텔레스 주석가라 불리워졌다. 그는 마지막 생애를 모로코에서 보냈으며, 1198년 그곳에서 72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감하였다.

아베로에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모든 철학자 중에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하였으며, 그를 자연이 낳을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인물의 표본이라 찬탄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와 사상에만 골몰하여 연구하였다. 그는 앞서 소개한 아비켄나와 몇 가지 점에서 다른 주장을 제시하였다. 우선 아비켄나는 창조가 영원하고 필연적이라고 주장한 반면, 아베로에스는 어떠한 철학도 그러한 교의를 알지 못하며, 그것은 종교의 교리에 불과하다고 하여 아비켄나의 창조론을 부정하였다. 또한 아베로에스는 본질과 존재간의 구별을 부인하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아비켄나가 말하는 가능한 지성과 능동적인 지성을 구별할 어떠한 실재적인 차이점도 발견하기 어려우며 단지 분석의 목적상 논리적인 차이점을 둘 뿐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아베로에스는 인간의 형상은 영혼이지만 영혼은 물질적이며 정신적이 아닌 형상이라고 주장하였다. 물질적인 영혼은 육체와 똑같은 소멸성을 지니므로 어느 것도 죽음 뒤에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이다. 동물들 중에 인간이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하급 동물과는 달리 인간은 지식을 통하여 매개적 지성과 결합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각 인간은 각자 독특한, 가능한 지성을 소유하고 있으며 모든 인간에게 동일한 매개적 지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한 아비켄나와는 달리 아베로에스는 인간이 분리된 가능한 지성을 소유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보편적인 매개적 지성 안에 인간의 지식을 위치시키고 있으며 영혼 불멸설도 부정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위험한(기독교인에게) 비기독교적 이론의 영향력은 지대하였으며 아퀴나스조차도 그의 논제를 자주 인용하였을 정도였다. 이처럼 아베로에스는 신학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으며 철학의 영역과 신학의 영역, 즉 이성과 신앙의 영역을 아주 세세하게 구별하였다.

철학과 신학은 각자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그는 믿었다. 왜냐하면 그것들 각각을 다루는 사람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그는 인간을 다음의 세 부류로 나누었다. ① 대부분의 사람은 이성이 아닌 상상에 의해 살고 있다고 그는 파악하였다. 많은 사람은 화술에 능한 설교자들에 의해 전달된 두려움에 의해 선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철학자는 두려움이 필요 없으며 그의 지식에 따라 행동한다. 종교와 철학이 일반적으로 같은 목적을 추구할지라도, 그것들은 다른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며 따라서 다른 진리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 진리들은 항상 서로 모순되는 것은 아니며 단지 종류가 다를 뿐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이성에 의해서보다는 상상의 사유에 의해 지배되는 이들을 가리킨다. ②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은 신학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들이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과 다른 것은, 단지 그들이 같은 종교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지적인 근거를 만들려고 한다는 것뿐이라고 아베로에스는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고정적인 가정 위에서 자신들의 사상을 기초함으로써 스스로 그 사상을 해치고 있기 때문에 비록 약간의 이성의 힘을 가지고 있다 하여도 그들은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고 보았다. ③ 세 번째이자 가장 최상의 부류는 철학자로 이루어진 소수 집단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종교적인 인간과 이성적인 신학자가 추구하는 진리를 인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종교에 대한 불가피한 간접적인 조망을 통하여 이 진리를 찾아야 할 어떠한 이유도 발견하지 못한다. 실제로 아베로에스는 종교적인 신앙은 사회적인 기능을 가진다고 주장했는데, 그것들은 철학적인 사유를 할 수 없는 정신들에게 철학적인 진리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 의하면 신학자는 대중에 비해 반드시 이성과 반대되는 것은 아니지만, 본질적으로 이성으로부터 벗어난 주제에 대한 복잡한 추론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더욱 잘 인식했어야 한다고 하였다.





2. 유태철학 : 모세 마이모니데스

유태와 아랍 철학은 모두 12세기 기독교 철학보다 진보해 있었으며 월등한 우위에 있었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기독교 철학자들은 그리스 철학의 여러 개념에 대한 이해가 불충분하였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다룬 [철학과 삶]의 서양철학사에서 보아온 바와 같이, 아랍 인들은 9세기 이래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를 가지고 투철하게 연구하였다. 위대한 유태 철학자인 마이모니데스(Maimonides)도 아랍 인들이 전한 서적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를 접하게 된 듯 하다. 아랍과 유태 철학자들은 주요한 철학의 문제들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마련해 주었으며, 10세기에서 13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유럽의 학문을 인도한 선각의 위치에 있었다. 마이모니데스는 특히 다음 세대의 기독교 사상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왜냐하면 그는 구약성서에 대하여 그들과 공통된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약성서의 사상과 그리스 철학 및 과학을 조화시키려는 마이모니데스의 시도는 신학과 세속 학문을 융합시키려 하였던 토마스 아퀴나스의 표상이 되었다.

모세 마이모니데스(Moses ben Maimonides)는 1135년 코르도바에서 태어났으며 그곳에서 태어난 아베로에스와 동시대인이었다. 그는 스페인을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모로코와 이집트에서 의사로 지내며 1204년, 69세의 나이로 카이로에서 영면하였다. 그의 주저는 원래 아랍 어로 씌어졌다가 라틴 어로 번역된 「방황하는 자들의 인도자(Dux perplexorum)」로 알려져 있다. 이 저서에서 그는 유태교의 교리가 철학적 사상과 조화를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성서적 사상은 이성으로 발견할 수 없는 확실한 통찰을 보여 주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그는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를 포함한 방대한 양의 서적을 참고하였다. 그는 유태교 신학의 합리적인 기초를 마련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를 매우 효율적으로 이용함으로써 다른 학자들, 특히 기독교 사상을 철학과 융합시키려는 철학자에게 강한 영감을 주었다.

다른 사람들이 흔히 다루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견해를 나타내는 대신에 마이모니데스는 매우 독특한 개념을 제시하였다. 첫째로 그는 신학과 철학, 그리고 과학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저서 「방황하는 자들의 인도자」는 주로 철학자들의 여러 이론을 공부하고 율법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 의해 방황하고 있는 유태인들을 위해 쓴 것이었다. 율법학(Torah)과 철학은 각기 독특한 형태의 지식이라는 점을 그는 그 저서에서 밝히며 그것들이 상반되지 않더라도 그것들의 내용과 범위는 같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모든 종교적인 교리가 항상 합리적이거나 철학적인 근거를 가질 필요가 없음을 인정하였다.

둘째로 창조설은 종교적인 신앙의 문제라고 설명하였다. 아비켄나의 철학에서는 세계는 영원에서 창조되었으며 시간 안에서는 창조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마이모니데스에 의하면 이 문제에 대한 철학적인 증명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창조설을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논거는 철학적으로 볼 때 똑같은 비중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후에 아퀴나스도 이와 같은 입장을 취하였으며, 그는 마이모니데스처럼 종교적인 견해는 이성적인 사상과 모순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종교적인 견해가 보편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셋째로 마이모니데스에 의하면 신앙과 이성 사이의 갈등은 두 가지 원인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종교의 신인동형동성론(神人同形同姓論)적인 언어와 신앙의 문제에 있어 우매한 자들이 접근하는 무질서한 방식이 그것이라는 것이다. 그는 수학과 자연 과학으로부터 시작하여 율법의 연구, 그 다음에 형이상학 혹은 전문적인 철학적 신학으로 점차 나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종류의 방법론적인 훈련을 통해 성서적인 비유적 성격에 대한 이해가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인 언어에 있어서 신인동형동성론적인 요소를 감소시키기 위해서는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개념들의 범주 속에서 훈련을 강화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네 번째로 마이모니데스는 인간 본성의 구조에 관한 시각은 아비켄나와 의견이 같았다. 아비켄나와 같이 그는 인간의 본질적인 지식의 원천으로서 매개적 지성론을 수용하였다. 각 사람은 그에게 독특하게 속해 있는 가능한 혹은 수동적인 지성만을 소유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각자는 능동적인 지성을 획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능동적 지성이란 곧 매개적 지성이거나 아니면, 각 인간의 장점의 정도에 따라 정도를 달리하면서 매개적 지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죽은 뒤에 인간의 육체의 형상인 영혼은 사라지며, 남는 유일한 요소는 매개적 지성에서 나와 다시 그것으로 되돌아가는 능동적이고 지적인 성분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영혼 불멸설이라면 그것에는 각 개인의 독특한 특성이 매우 감소한다고 하였다.

다섯째로 마이모니데스는 아퀴나스의 신의 존재에 대한 세 가지 증명의 선구자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과 「물리학」의 부분을 사용하여 그는 제 1 동인(動因)의 존재와 필연적인 존재의 증명과 제 1 원인의 존재를 증명하였다. 세계가 무(無)에서 창조되었는지 아니면 영원에서 존재하게 되었는지의 여부는 자연 신학을 확립하는데 별다른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그러나 신의 존재를 증명한 후 아퀴나스와는 달리 그는 신의 본질에 대한 언급의 가능성을 철저히 배제하였다. 신에 대해서는 어떠한 긍정적인 속성도 언급될 수 없고, 신은 그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부정적인 속성만을 주장하였다.

여섯째로 그는 인간의 삶의 목적은 인간에게 적합한 완전성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철학자들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완전성의 종류를 네 가지로 구분하고 있는데, 1) 소유의 완전성, 2) 육체의 구성 및 모양의 완전성, 3) 도덕적인 덕의 완전성, 4) 최상의 단계인 이성적 존재의 획득에 의한 완전성이 그것이었다. 마이모니데스에 의하면, 이성적인 덕에 의해 비로소 인간은 인간이 될 수 있다고 하면서 “나는 신성한 사물들에 대한 참된 의견을 가르쳐 주는 예지적 지성의 개념을 알게 된다. 그것은 참된 실재에 내재하는 궁극적인 목적이다. 따라서 그것은 개인에게 참된 완전성을 부여해 주는 것이며 그것을 통하여 인간은 인간이 되는 것이다.”라고 기술하였다. 인간의 완전성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또한 신앙에게도 가능하였다. 왜냐하면 마이모니데스는 다음과 같은 말로 결론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예언자들도 역시 철학자들이 해석한 것과 동일한 개념들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하여 신앙과 이성은 동일한 목적을 위해 조화를 이룬다는 것을 그는 동시대와 이후의 시대의 사람들에게 명증하게 남겼다.





마무리

얼마 전 Q / A 게시판에 철학을 왜 공부하는가에 관한 질문이 들어왔었다. 나는 그런 유형의 질문을 꽤 자주 받았고, 또 그 질문에 관한 답변이 무의미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자주 느꼈다. 자신의 내면에서 제기된, 혹은 다수의 사람들이 제기하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이 철학의 일이며, 이것이 오래전부터 철학이 짊어지고 있는 철학의 존재이유라는 것을 나는 거의 언제나 의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의문에 관한 해답이 상주하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바뀌고 또 일정한 원칙이나 형식에 따르지 않을 뿐 아니라 때와 장소에 따라, 또는 상황에 따라 예외적인 해법이 있는 것이라는 인식이 보편화된 오늘의 시대에 철학이 과연 어떤 일을 할 수 있으며, 또 그것을 공부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단지 성향의 문제만이 남을 뿐이다. 나는 자신의 성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불행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을 기억한다.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도 있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랑에 집착하는 사람도 있으며, 버림받은 아이들을 위해 온갖 모욕을 감내한 사람도 있을 뿐 아니라 혼신을 다해 육체적, 또는 정신적 고행으로 수행한 삶의 유형도 있다. 그들의 행위는 이해할 수 없지만 그 성향을 나는 이해한다. 이제 철학도 그런 성향의 문제로 남을 뿐이다.

서양철학사에 이름을 올린 대부분의 중세 철학자들은 보편자에 대한 실재론과 유명론의 양극단을 지양하면서 한 시대를 풍미한 사람들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러한 이들의 이론을 마치 철학자의 유서처럼 받아들여 당대 최고의 이론과 증명을 완수하였다. 그는 아벨라르두스의 온건 실재론이나 아비켄나, 또는 마이모니데스의 이론을 대부분 받아들였으며, 보편자의 지위에 대한 아비켄나의 공식을 사용하여 보편자를 설명하였다. 그에 의하면, 보편자는 사물의 외부에 존재하지만 신의 정신 안에서 신성한 이데아로서 존재하며, 종의 모든 구성 요소들 속에서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본질로서 사물 내에 존재하고, 개체로부터 보편 개념을 추상한 후에 정신 내에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다음 편에는 이처럼 심오한 중세 철학의 절정이자 에센스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을 다룰 생각이다. 다섯 편이나 여섯 편 정도의 분량이 되지 않을까 싶다. 비가 내리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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