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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 대한 오묘한 질문에 대하여-칙센트미하이와세네카의‘행복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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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SAVORY 댓글 0건 조회 3,002회 작성일 12-02-22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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칙센트미하이와 세네카의 ‘행복론’

동서고금의 많은 사상가들이 행복론을 펼쳤지만 행복이란 잡힐 듯, 알 수 있을 듯하면서도, 무지개처럼 늘 저만치 떨어져 있다. 심리학, 철학, 경영학 등 여러 학문 분야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석학의 면모를 과시해 온 칙센트미하이는, 평생의 연구 과제로 행복의 문제를 붙잡아 씨름해왔다. 그런 그의 연구 성과를 집약한 책이 바로 『플로우: 미치도록 행복한 나를 만난다』(한울림)이다.
어떻게 하면 미치도록 행복한 나 자신을 만날 수 있을까? 칙센트미하이는 행복이란 결코 우연히 찾아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행복도 내가 하기 나름이라는 뜻. 그는 행복을 최적 경험이라는 말로 바꾸어 말한다. 그가 말하는 최적 경험은 ‘내 운명의 주인이 온전히 나 자신이라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고양되고 행복하다는 기분을 맛보는 순간’이다. 그러한 상태를 칙센트미하이는 플로우(flow), 즉 ‘물 흐르는 것처럼 편안한 느낌’ 또는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가는 느낌’으로 표현한다. 말만 들어도 행복해지는 것 같다.

어떻게 하면 그러한 플로우를 경험할 수 있을까?
칙센트미하이가 말하는 플로우의 구성 요소는 이렇다. 명확한 목표가 있다. 나의 모든 주의가 지금 하고 있는 활동에 완전히 쓰인다. 개인의 능력에 따라 성공 가능성이 있는 과제가 주어져 있다. 즉각적인 성공과 실패에 대한 피드백이 있다. 일상에 대해 의식하지 않고 깊은 몰입이 일어난다. 나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 자아에 대한 의식이 사라지지만, 플로우를 경험한 뒤에는 자아감이 강해진다. 또한 시간 개념이 왜곡되는데, 예컨대 몇 시간이 몇 분인 것처럼 느껴지고, 몇 분이 몇 시간처럼 느껴진다.
 
플로우의 이런 구성 요소들이 다소 어렵게 느껴진다면, 어린 시절 동네 친구들과 정신없이 뛰어놀던 때를 떠올려 보자. 술래잡기, 구슬치기, 고무줄놀이, 딱지치기 하면서 놀다보면 어느 사이 해는 서쪽으로 넘어가고 있다. 이렇게 시간이 빨리 지나가다니! 물론 놀이에서만 플로우를 경험하는 건 아니다. 무슨 일에서든 정신없이 몰두하다보면 언제 시간이 지나갔는지 느끼지 못하면서 뿌듯한 성취감을 느낄 때가 있다. 요컨대 플로우는 놀이나 여가에서도, 일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 대부분은 플로우를 좀처럼 느끼지 못한다.
TV 시청, 음악 감상, 운동 경기나 공연 관람 등, 일종의 대리 참여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 활동(?)은 공허감을 일시적으로 달래줄 수 있을지 몰라도, 거기에서 플로우 경험을 얻기는 힘들다.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 운동 경기를 하고 있는 사람, TV 드라마 연기를 하고 있는 사람은 플로우를 경험할지 모르지만, 그런 것을 지켜보고 있는 우리들은 플로우를 경험하지 못한다. 실험 결과에 따르면,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사람보다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플로우 경험을 4배나 더 많이 했다.
 
이러한 플로우 개념은 노동과 여가에 대한 통념을 흔들어 놓는다. 여가 시간보다 일이 더 즐기기 쉽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플로우는 스스로 목적성을 가지고 적극적인 사고를 통해 상황을 주도적으로 통제할 줄 안다면, 어느 상황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필자는 이렇게 생각하곤 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기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읽고 싶은 책이나 실컷 읽고 영화나 실컷 보면서 한가하게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은 일이 많이 밀려 정신없이 일을 해치워야 할 때 쉽게 든다.
 
그러나 막상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주어지면? 처음 한 시간 정도는 만족스러울지 모른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심심해 죽겠다는 기분마저 들며 멍한 상태가 되지 않는가? 내가 진정으로 몰두하고 싶은 일, 나 자신도 잊고 시간이 흐르는 것도 잊으면서 집중할 수 있는 일이 뭔지 모르는 사람의 불행이다. 남이 나에게 시킨 것만 억지로 하고, 남이 나에게 주는 것만 누려온 사람의 불행이다.

첫머리에서 말한 김상용의 시를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자.

남으로 창을 내겠소 / 밭이 한참갈이 / 괭이로 파고 / 호미론 김을 매지요 /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 강냉이가 익걸랑 / 함께 와 자셔도 좋소 / 왜 사냐건 웃지요.’ 왜 사냐고 물으니 그냥 웃었지만, 그 웃음은 밭을 갈아 괭이로 파고 호미로 김을 매고, 새소리를 벗 삼으며 강냉이 익는 걸 기다린 사람. 다시 말해서 힘겨운 노동이지만 그 안에서 플로우를 경험한 사람의 행복한 웃음이 아닐지. 행복은 미래의 어느 시점에 나에게 찾아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하는 사람만이 지금 이 순간 누릴 수 있는 게 바로 행복이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들을 보면 시상대 위에 올라가 메달을 목에 걸고 꽃다발을 받을 때 가장 행복해 보인다. 만면에 가득한 웃음과 곧 이어지는 감격적인 태극기 게양과 애국가 연주. 그 순간 어떻게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칙센트미하이의 행복론에 따른다면 그들이 정말로 가장 행복한 순간은 경기에 몰두해 있을 때다. 자신의 기량을 최선을 다해 펼치며 오로지 경기에만 집중하고 있을 때, 선수들은 가장 행복하다는 것이다.

세네카의 행복론

이제 오늘날이 아니라 고대의 행복론을 살펴보자.
고대 로마의 사상가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가 펼친 행복론이다. 세네카는 네로 황제의 정치적 조언자 겸 참모로도 활동했지만, 네로의 폭정이 심해지면서 공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연구와 저술에 힘을 쏟다가 네로 황제로부터 반역을 꾀한다는 의심을 받자, 스스로 혈관을 끊고 자살했다. 이렇게 정치적 격랑 속에서 많은 부침을 겪어야 했던 인물이기에, 그가 펼치는 행복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네카가 남긴 철학 에세이들 가운데 ‘인생의 짧음에 관하여’, ‘마음의 평정에 관하여’, ‘섭리에 관하여’, ‘행복한 삶에 관하여’ 등을 묶은 『인생이 왜 짧은가』(숲)에서 그의 행복론과 만날 수 있다. 제목에 나오는 질문, 인생이 왜 짧은가에 대한 세네카의 답부터 살펴보자.

“짧은 수명을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수명을 짧게 만들었고,

수명을 넉넉히 타고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수명을 낭비하는 것이라오. 마치 왕에게나 어울릴 넉넉한 재산도 적합하지 않은 주인을 만나면 금세 탕진되고, 얼마 안 되는 재산도 제 주인을 만나면 사용함으로써 늘어나듯이, 우리의 수명도 제대로만 배분하면 크게 늘릴 수 있을 것이라오.”
 
이러한 세네카의 통찰은 로마인들의 일상생활을 관찰하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바라 본 결과이기도 하다. 원형경기장에서 아무 죄 없는 검투사가 맹수들과 싸우며 갈기갈기 찢기는 것을 열광적으로 즐기는 자들, 일상적으로 주연을 열고 더 먹기 위해 노예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음식을 토해내는 자들, 날마다 머리를 가꾸기 위해 이발소에 가는 자들. 서로 뺏고 빼앗기고, 서로 휴식을 망쳐놓고, 서로 불행하게 만드는 사이 그들의 인생은 소득도 없이, 즐거움도 없이, 정신적 향상도 없이 지나가버린다고 세네카는 지적한다.

그렇다면 행복한 삶이란 어떤 삶인가?

세네카에 따르면 ‘올바르고 확고한 판단에 기초하고 있어 동요하는 일이 없는 생활의 자세’를 지키는 것이 행복한 삶이다. 외적인 환경을 자기 마음에 맞게 바꾸기는 힘들더라도, 자신의 내면의 상태가 건전하고 건강하다면 아무리 외적인 환경이 자신에게 불리해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네카의 생각은 스토아 철학의 핵심이기도 하다. 폭풍우 몰아치는 것 같은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내면의 미덕과 이성과 양심을 굳게 지켜나가는 삶이야말로 이상적인 삶, 행복한 삶이라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세네카는 우리가 대체로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한다고 꼬집는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언변을 믿다가 실족하고, 어떤 사람은 재산상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요구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허약한 몸에 힘겨운 의무를 지운다네. 어떤 사람은 너무 소심하여 정치에는 맞지도 않네. 정치를 하려면 뻔뻔스러워야 하네. 어떤 사람은 고집이 세어 궁정 생활에는 맞지도 않네. 어떤 사람은 분노를 억제할 수 없어 아무렇게나 성을 내다가 경솔한 말을 하고 만다네. 어떤 사람은 재치를 억제하지 못해 위험한 농담을 내뱉는다네.”

불행은 바로 위와 같은 것에서부터 싹튼다.

자기 자신에 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쓸데없이 분주하기만 한 생활에서 불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외적인 것에 마음 쓰지 말고 자기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메시지를 세네카는 이런 말로 전한다. “자신을 좋아하고, 자기 것을 존중하고, 남의 것을 되도록 멀리하고, 자신에게 헌신적이어야 하네.”
 
칙센트미하이와 세네카 사이에는 2천 년의 세월이 가로놓여 있지만, 그들이 펼친 행복론에서 우리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행복은 외적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내면의 문제, 곧 마음의 문제라는 것, 행복의 기준은 나 자신과 먼 바깥에 있거나 미래에 있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활동이나 생활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 결국 행복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무지개와 같은 것이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 나 자신’에 달려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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