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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웰빙이 아니라 웰다잉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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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미 댓글 0건 조회 1,297회 작성일 15-06-08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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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인생 풍경’을 그리는 박정희 할머니(85세)는 예순의 나이에 수채화가로 화단에 데뷔해 인천 화평동에 ‘평안 수채화의 집’을 운영하면서 그림을 가르쳤다. 30년 넘게 운영한 화실에는 붕어빵 만드는 아주머니, 공장 노동자, 평범한 주부, 학생 등 적잖은 사람들이 거쳐 갔다. 지위 고하, 재산 유무에 상관없이 화실에서는 모두 평등한 동호인이었다. “죽음이 얼마나 준엄한 순간인데, 그런 순간에 간호사 부르고 의사 부르고 해야 하는가.” 날이 갈수록 사그라져가는 자신의 육체에 대한 안타까움도 그의 마음에 자리하지는 않는 듯했다. 할머니의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깨끗하고 아름답게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자녀들에게 고귀한 가르침을 주고 떠났다. “인간의 삶이란 적당히 시들어가는 것이다. 남편과 내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죽어가는 모습을 기록으로 잡아놔야겠다. 저 양반이 가는 것도, 나의 죽음도 구경거리다. 나는 즐겁게 살았다. 하느님이 언제 올지 물으신다면, ‘만사 오케이! 지금이 최고입니다!’ 라고 말하겠다.”

웰빙well-being이란 말이 유행한 지 오래다. 사람들은 흔히 웰빙을 단지 잘 먹고 잘 산다는 뜻으로만 이해하는데, ‘잘 산다’라는 말에서 ‘잘’에 부여하는 의미는 여러 가지일 것이다. 웰빙과 관련해 사람들이 쉽게 간과하는 문제, 그러나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문제가 바로 죽음이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잘’ 살았다한들 죽음을 편안히 맞이하지 못했다면 ‘잘’ 살았다고 할 수 없다. 흔히 행복한 삶, 건강한 삶만 생각할 뿐이지만 ‘행복한 죽음’ ‘건강한 죽음’도 중요한 문제다. 어떤 사람의 마지막 모습이 결코 행복하지 못하다면, 그는 진정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없다. 웰빙의 완성은 웰다잉에 있으므로, 이제 우리는 웰빙을 삶의 문제에만 한정시킬 게 아니라 웰다잉에까지 확대해야 한다.
죽음을 편안히 맞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바로 우리가 삶을 영위하는 방식이라고 달라이 라마가 말했다. 삶을 이치에 맞게 살지 않고서 죽음을 편안히 맞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올바르게 사는 법을 익혀야 죽음을 평온하게 맞을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으므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제한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죽음의 임박성을 의식하면서 살 때 ‘내게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면 내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지’ 자신에게 되묻게 된다.

사람마다 죽는 모습이 천차만별인 것은 결국 죽음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은 곧 인간으로서 존엄함을 지니고서 죽는 사람이 드물다는 뜻이다. 죽음은 삶과 둘이 아니므로, 죽음을 이치에 맞게 이해하지 못하면 삶 역시 바르게 살지 못하게 된다. 사람들이 자주 범하는 오해가 바로 ‘죽으면 다 끝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다. ‘죽어버리면 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에 자살하는 사람도 있다. 달라이 라마에 따르면 ‘죽음이란 옷을 갈아입는 과정’일 뿐이므로 영혼이 육신의 옷만 벗는 것이다. 생사학의 창시자 퀴블러 로스 박사는 죽음에 직면한 어린아이를 향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몸은 번데기와 마찬가지이다. 죽으면 영혼은 육신으로부터 벗어나 나비처럼 예쁘게 날아서 천국으로 날아간다.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다.”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자신이 죽어가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죽음을 생각하므로 지나간 삶을 후회하면서 남은 삶을 마감하게 된다. 죽음에 대해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사례가 많고 자살 사망률이 최근 들어 급증하는 데다가, 또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미소 속에서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우리 현실을 감안해볼 때, 죽음에 대한 인식 전환이 시급한 상황이다. 죽음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켜 삶을 바르게 영위함으로써 삶과 죽음의 질을 향상시키는 일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 죽음 준비 교육은 죽음을 바르게 이해하도록 함으로써 삶을 더욱 의미 있게 살도록 하고 죽음을 편안하게 맞이할 수 있도록 돕는 삶의 준비 교육이기도 하다.

행복한 죽음을 맞이한 일화가 있어 소개한다. 열한 명의 아들딸을 훌륭하게 키워낸 미국의 할머니(91세)가 혼수상태에 빠졌다. 온 가족이 다 함께 모여 할머니를 위해 기도를 했다. 기도가 끝나자 할머니는 눈을 번쩍 뜨고서 “나를 위해 기도를 했구나. 고맙다. 그런데 위스키 한 잔 마시고 싶은데”라고 말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위스키 한 잔을 가져오자 할머니는 한 모금 마시고는 “미지근하니까 얼음 좀 넣어줘”라고 말했다. 두 시간밖에 살 수 없다고 여겨지는 할머니가 얼음까지 요구하니 모두 충격을 받았다. 얼음을 넣어주자 할머니는 “맛있다”라고 말하면서 전부 마셔버렸다. 이어서 “담배를 피우고 싶구나”라고 말했다. 여유 있게 담배 한 대 피우더니 가족에게 감사를 표한 뒤 “천국에서 만나자, 안녕”이라고 말하고는 숨을 거두었다. 그때 할머니의 죽음을 슬퍼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할머니는 평생 위스키나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다. 할머니는 91세까지 장수하면서 많은 장례식에서 모두가 애통해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자신이 죽으면 사람들을 슬프게 할 게 아니라 밝은 분위기를 만들어주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건강한 삶을 원하듯이, 마찬가지로 누구나 건강한 죽음을 원할 것이다. 그럼에도 대다수 사람들은 마치 불행한 죽음을 준비하는 것처럼 죽음 앞에서 크게 흔들린다. 우리는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만 생각했을 뿐, 어떻게 죽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삶과 죽음은 서로 다르지 않으며 하나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으므로,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물음은 이제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질문으로 바뀌어야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물음은 너무 세속적인 틀에만 얽매이게 하지만,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물음은 삶과 죽음에 대한 보다 포괄적이고도 심층적인 문제 제기이다. 더구나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은 그 삶을 비추어주는 거울이다. 죽는 바로 그 순간 좋든 싫든 우리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난다. 우리 삶에는 거짓이 통용되지만, 죽음의 순간 자신의 존재의 값어치는 남김없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죽는 시간을 우리가 선택할 수는 없다. 그러나 죽음이 찾아올 때 어떤 태도로 임하느냐, 어떤 식으로 죽을 것인가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정할 수 있다. 죽음을 잘 준비하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고, 누구나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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