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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아트 컬렉션을 완성한 엉뚱한 컬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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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ewha 댓글 0건 조회 2,753회 작성일 11-05-16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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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미술의 인기는 어디까지 치솟을까? ‘현대 미술엔 흥미 없다’고 밝히기가 짝사랑 상대에게 마음 고백하기보다 더 어려울 만큼 뜨겁고 폭넓게 관심을 받고 있다. 좋아하는 작가 몇은 댈 수 있고, 현대 미술의 메카인 뉴욕과 런던의 미술관은 대충이라도 섭렵해야 말발이 선다. 현대 미술의 주요 작품을 소장한 미술관과 갤러리. 그 방대한 컬렉션 뒤에는 누가 있을까? 

뉴욕 현대 미술관, 구겐하임 미술관, 휘트니 미술관, 사치 갤러리, 내셔널 갤러리, 테이트 모던…. 이들 미술관에는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 풍성한 아트 컬렉션이 전시돼 있다. 그리고 날마다 전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별다른 동경 없이 온 사람이 작품 앞에서 평생 잊지 못할 감동을 받기도 한다. 훌륭한 아트 컬렉션 뒤에는 위대한 컬렉터가 존재한다. 그들은 단순한 컬렉터라기보다 문화 후원자다. 올봄, 평생 모은 시가 1억2500만 파운드 상당의 미술품을 공공 미술관에 기증한 런던의 전직 화상 앤서니 도페이의 이야기가 <뉴욕 타임스> 등 언론에 소개되었다. 그는 요제프 보이스, 제프 쿤스, 데미언 허스트 등 주요 컨템퍼러리 작가의 작품을 포함해 방대한 아트 컬렉션을 현재 가격이 아닌 구입가 2800만 파운드에 선뜻 내놓았고, 이를 영국 정부와 스코틀랜드 정부가 공동 구입했다. 공공 미술관은 사설 갤러리에 비해 일반적으로 컨템퍼러리 작품이 크게 부족하다. 그러나 그의 컬렉션이 2009년부터 영국 전역 공공 미술관에 전시되면 영국의 공공 미술관은 한층 젊고 활기에 넘칠 것이다. 도페이는 “정체된 컬렉션은 컬렉션이 아니다”라고 했다.

바로크 미술 뒤에도 막강한 컬렉터가 있었다. 오스트리아 제국과 피렌체의 빛나는 예술 뒤에는 합스부르크 왕가와 메디치가가 있었다. 중세에는 이처럼 왕실과 귀족, 교회가 예술품을 발주하고 소장하며 예술가를 후원하는 주체였다. 그들은 이런 활동을 사명으로 여겼고 아낌없이 예술을 향유했다. 그러나 다른 분야가 대부분 그렇듯 근세로 넘어오면서 페이트런patron과 컬렉터collector의 성격도 달라졌다. 근대의 컬렉터는 신흥 귀족에 해당하는 성공한 기업가와 그의 가족. 이들은 사명감보다는 마치 유행처럼 예술품 수집에 열중했다. 개인의 컬렉션에는 취향이 반영되므로 컬렉터의 심미안이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됐다. 이들은 중세의 왕족이나 귀족과 달리 자신의 컬렉션을 꽁꽁 감춰두기보다는 미술관을 설립하고 이를 대중에게 개방하여 예술 향유 계층의 폭을 넓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뉴욕에 현대 미술의 뿌리를 내린 애비 록펠러
뉴욕 시장 마이클 블룸버그는 2015년까지 관광객 5000만 명 유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첫 번째 요소로 예술 장려를 꼽았다. 그도 그럴 것이 뉴욕 현대 미술관MoMA이 창출하는 경제 효과만 해도 매년 20억 달러가 넘기 때문이다. 뉴욕을 정신적,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하는 이 미술관은 아이러니하게도 대공황이 미국 전역을 덮친 바로 그 시기에 탄생했다. 설립자는 ‘미국 왕조American Dynasty’라 불리는 록펠러 가문의 며느리 애비 앨드리치 록펠러(1874~1948년)와 릴리 플러머 블리스, 메리 퀸 설리번이다.

세 명 가운데 주축은 애비 록펠러. 미술품 구입과 미술관 설립 자금은 록펠러 가문의 것이었지만 탁월한 안목과 식견은 온전히 그녀 자신의 것이었다. 만약 록펠러 2세가 애비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록펠러 가문은 현대 미술계에 이렇게 큰 업적을 남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록펠러 2세는 아버지 록펠러 1세가 록펠러 재단을 통해 펼치던 자선 사업을 이어가면서 클로이스터 미술관의 중세 유럽 컬렉션을 100만 달러에 구입해 1925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기증하는 등 문화도 적극 후원했다. 하지만 현대 미술에는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혐오했다.

애비의 아버지는 로드아일랜드 주 상원의원이었던 넬슨 앨드리치. 앨드리치 가문은 록펠러만큼 부자는 아니어도 권위 있는 상류 명문가였고, 애비는 어릴 때부터 드가의 드로잉과 수채화를 수집했으며 유럽 여행으로 예술과 문화에 대한 안목을 키운 세련된 아가씨였다. 당대 재계와 정계 최고의 가문이 만난 이들의 결혼(1901년)은 <타임>을 비롯한 각종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검소하고 절제하는 가풍이 몸에 밴 록펠러 2세는 내성적이고 매사에 조심스러운 반면, 그녀는 늘 쾌활했고 뉴욕의 문화와 사교 생활에 곧 익숙해졌다. 결혼 초에는 그녀도 남편의 취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르네상스 이전 회화 등을 수집했다. 당시 미국 컬렉터들은 유럽 걸작을 구매하는 데 몰두했고 혁신적 작가에게는 별반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1913년 미국 최초의 국제 현대 미술전으로 인상파, 야수파, 입체파, 다다이즘, 추상 미술에 이르는 유럽 모더니즘 경향을 망라한 아머리 쇼(병기고armory를 전시장으로 이용한 데서 붙은 이름)를 본 후 현대 미술의 매력을 발견한다. 미국적 예술 취향의 전환점이 된 이 전시는 그녀뿐 아니라 미국 전체에 충격이었다. 새로운 미술의 가능성을 경험한 것이다.

애비는 1925년부터 조지아 오키프, 맥스 웨버 같은 미국의 젊은 작가 작품과 미국 민속 미술품을 수집하는 동시에 반 고흐, 마티스, 피카소 등 유럽 모더니즘 미술가의 작품도 다양하게 구입했다. 매우 폭넓은 시대와 작품을 망라한(때로는 약점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애비 록펠러의 컬렉션은 그녀가 고전 작품 위주로 흐르던 당시 미술계와는 매우 다른 길을 걸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 아이들이 흥미를 갖고 함께 호흡할 작품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녀가 말한 이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중이 현대 미술을 감상할 수 있는 미술관을 설립할 필요성을 느끼고, 같은 생각을 공유한 두 여성과 뭉쳐 뉴욕 현대 미술관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록펠러 2세는 처음에는 그녀의 활동을 돕지 않았다. 미술관은 맨해튼 웨스트 53번가 11번지에 위치한 록펠러가의 9층짜리 저택 7층에서 시작되었다. 세계 최고 재벌의 부인이지만 미술관 운영 기금도 직접 조달해야 했고, 설립 후 10년간 무려 세 번이나 이사를 해야 했다. 그러나 록펠러 2세는 결국 아내의 활동을 뒷받침해주었다. 1939년 록펠러 2세는 저택을 미술관 부지로 제공했고, 이후 거액의 돈도 기부했다. 미술관은 더 이상 옮겨 다닐 필요가 없었고 지금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당대 여성으로서는 다소 혁신적이고 급진적인 애비 록펠러의 사회 활동은 록펠러가의 명예를 높였다. “내게 미술은 인생의 위대한 자산 중 하나다”라고 말한 그녀는 엄격하고 금욕적인 록펠러가의 분위기에 미술을 향유하고 후원하는 여유와 풍요로움을 심었다. 그러나 그녀가 기여한 것은 록펠러 가문만이 아니다.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뉴욕에서 다양한 근현대 미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은 그녀의 감식안과 신념 덕이 크다.

예술을 사랑한 보헤미안, 페기 구겐하임
뉴욕 현대 미술관과 더불어 뉴욕을 대표하는 미술관이 구겐하임 미술관이다. 이곳의 설립자 솔로몬 구겐하임도 19세기 미국의 신흥 재벌. 그러나 더욱 특별한 컬렉터는 그의 조카 페기 구겐하임(1898~1979년)이다. 비슷한 시기에 현대 미술에 엄청난 기여를 한 여성이라는 점에서 애비 록펠러와 공통점이 있지만 이 둘은 인생도 컬렉션도 매우 다르다.

페기가 열네 살 되던 해에 아버지 벤저민 구겐하임이 타이타닉호 침몰로 사망하는데, 당시 그녀가 상속받은 유산은 45만 달러. 액면가로는 적지 않지만 구겐하임 가문의 척도로 보자면 보잘것없는 금액이었다. 그녀는 답답한 상류 사교계나 신부 수업보다 버나드 쇼, 입센, 오스카 와일드 등 당대 문학에 더 관심을 보인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스물한 살 생일에 뜻밖의 유산을 추가로 받자 친구와 북미 대륙 횡단 여행을 하고 당시만 해도 검증되지 않은 코 성형수술을 시도할 정도로 어딘가 남달랐다. 20대에 미국을 떠나 유럽에 머물면서 그녀의 삶은 주변의 예술가와 첫 남편인 화가 로런스 베일, 연인이면서도 스승이나 다름없던 마르셀 뒤샹 등의 영향을 받아 본격적으로 성장한다. 뒤샹은 페기에게 여러 화가를 소개해주었고 현대 미술의 기초부터 가르쳤다. 페기는 미술뿐 아니라 문학, 음악 등 문화 전반을 향유했다. 대형 HMV 축음기를 가지고 있었고 음반도 수집했으며 보헤미안의 삶을 선망했다.

그녀는 누군가의 조언 없이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1938년 런던에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의 시초인 구겐하임 죈Guggenheim Jeune을 개관한 것도 절친한 친구의 권유가 계기가 됐다.


구겐하임 죈의 첫 전시를 마치고 장 콕토의 전위적인 작품을 구입하며 페기는 컬렉터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칸딘스키 전시를 비롯해 브란쿠시, 콜더 등의 작가가 참여하는 동시대 조각전 등 생동감 넘치는 추상 미술을 소개하는 전시를 기획했는데, 그녀는 자신이 개최한 각종 전시에서 적어도 한 아이템 이상은 구입했다. 고전 마스터피스는 그녀의 예산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지만 현대 미술은 달랐다. 당시에는 웬만한 부자는 어렵지 않게 구입할 수 있을 만큼 현대 미술품이 저렴했다. 지금은 어마어마하게 가격이 치솟았으니 투자로 여긴다면 ‘대박’ 감이다.

구겐하임 죈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는 뉴욕으로 돌아와 1942년 5번가에 금세기 미술Art of This Century 갤러리를 열었다. 전쟁은 예술의 중심지를 파리에서 뉴욕으로 이동시켰다. 그녀가 적극 후원하던 잭슨 폴록이 전후 추상 표현주의 사조를 한창 주도하던 바로 그 시점에 페기는 다시 유럽으로 떠났다. 그리고 1948년 이탈리아 베니스에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을 열었다. 페기는 온통 르네상스와 바로크 미술품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전혀 다른 예술 공간을 세운 것이다.

페기의 아트 컬렉션은 1938년부터 1940년까지 영국과 프랑스에서, 1941년부터 1946년 사이 미국에서 구입한 것이 대부분이다. 8년이라는 시간은 그녀의 80년 생애에서 길지 않은 시간이고, 주요 작품을 구입한 원가는 25만 달러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1910~1950년대에 활동한 작가들의 단면을 폭넓게 보여주는 컬렉션의 가치는 최상으로 인정받는다. 사적인 후원에는 개인의 특정한 취향이 반영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녀는 조금 달랐다. 달리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컬렉션의 완성을 위해 소장했다. 그리고 미술관을 설립해 많은 사람들이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했기에 더욱 위대하게 평가받는다.

그녀가 사망한 후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은 구겐하임 재단에 통합돼 현재 구겐하임 미술관 베니스 분관이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컬렉션 중 단 한 점의 작품도 가족에게 남기지 않았다. 그랬기에 지금까지 그녀가 완성한 컬렉션은 모두 그 자리에 보관돼 있다. 아들인 신드바드도 “만약 컬렉션을 가족에게 남겼더라면 산산이 흩어져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인정했다.

페기는 예술을 사랑했고 예술가를 도와주려 했다. 그녀는 예술가는 아니지만 컬렉팅을 창작만큼이나 창조적인 작업으로 인식했다. 베니스에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이 문을 연 지 올해로 60주년으로, 이를 기념한 다양한 전시를 기획하고 있다.

컨템퍼러리 아트의 대부 찰스 사치
영원불변한 것은 없다. 현대 예술에서 뉴욕만 한 강자는 없을 것 같더니 21세기가 가까워지면서 런던이 막강한 라이벌로 부상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컨템퍼러리 아트의 최강 컬렉터이자 괴짜 컬렉터인 찰스 사치(1943~)의 사치 갤러리가 자리한다.

미술계의 큰손이자 광고계의 거물인 그는 청년 시절부터 미술품은 아니지만 만화 <슈퍼맨>과 담배 카드, 주크박스 등을 모으는 것이 취미였다. 사치는 19세에 뉴욕 현대 미술관에서 잭슨 폴록의 그림을 보고 현대 미술 세계에 매료됐는데, 그가 세계 미술계에 영향을 미치는 컬렉터가 된 데는 첫 번째 부인 도리스 록하트의 역할이 컸다. 선배 카피라이터인 그녀는 예술과 문화에 대한 소양이 풍부했다. 도리스와 사치는 1973년 결혼한 후 주말마다 함께 런던과 파리의 화랑가를, 휴가 때는 뉴욕 소호를 찾았다. 열혈 컬렉터가 된 것이다. 두 사람이 함께 수집한 수많은 작품은 1990년 이혼한 후 사치의 개인 컬렉션이 됐다. 사치는 팝 아트, 미니멀리즘, 극사실주의, 신표현주의 등 새로운 트렌드의 작품을 뒤처지지 않게 수집하면서 1985년에는 런던 서부에 사치 갤러리를 개관했다.

찰스 사치는 지난 시대의 컬렉터는 물론 동시대의 컬렉터와도 스타일과 행동 양식이 많이 다르다. 그는 작품을 한꺼번에 사들이고, 한꺼번에 팔아치운다. 게다가 소장한 작품마다 상한가를 친다. 컬렉터가 아닌 사재기꾼이라는 비난도 듣는다. 그는 딜러나 화랑의 도움을 받기보다 자신의 취향을 믿고 직관적으로 작품을 수집한다. 1980년대에 그는 무명의 젊은 작가를 대거 발굴했는데 이들이 바로 데미언 허스트, 트레이시 에민, 마크 퀸, 게리 흄이다. 저렴한 가격에 이들의 작품을 구입해 자신의 갤러리에 걸었다. 그리고 그의 컬렉션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라는 전시를 열었다. 이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이후 세계 미술 시장에서 주목받는 작가로 부상했다.

찰스 사치는 “나는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산다. 그리고 전시를 통해 자랑한다. 그런 다음 팔고 싶으면 팔고 더 많은 작품을 산다. 작품에 대한 견해가 바뀌었기 때문에 파는 것이 아니다. 단지 모든 작품을 영원히 저장해놓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라고 자신의 독특한 컬렉팅의 이유를 밝혔다(<월간미술> 2001년 2월호). 인터뷰는 사절, 자신의 갤러리 전시 오프닝에도 참석하지 않는 데다 간혹 인터뷰를 하더라도 시니컬하게 거침없이 말을 내뱉는 환갑을 넘긴 이 남자는 무명작가의 작품을 싼값에 대량 구입한 후 전시와 홍보를 통해 작가를 띄워 가격을 상승시킨 후 되팔아 이득을 챙긴다고 비난도 많이 받지만, 지금까지 없던 괴짜 컬렉터임에는 틀림없다. 그는 자신을 바이어buyer라 여기며 비난 따위에는 개의치 않는 듯하다.

어차피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오며 아트 컬렉팅은 투자와 비즈니스의 개념이 훨씬 강해졌다. 앤디 워홀이 “비즈니스 예술은 예술 다음 단계이다. 좋은 비즈니스는 최선의 예술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오로지 이윤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의 향유와 후원이라는 궁극의 의미도 지켜나간다면 그것은 바로 ‘좋은 비즈니스’, ‘최선의 예술’일 것이다. 미래 컬렉터는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까? 21세기에는 또 어떤 위대한 컬렉터들이 예술의 세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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