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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과 다이아몬드 목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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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ewha 댓글 0건 조회 1,324회 작성일 11-01-29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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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신비를 잉태한 결정체"라고 불리우는 보석은 그가 지닌 아름다움과 희소성으로 인해 때때로 인간의 역사를 바꾸는 키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귀금속이 국가의 흥망을 좌우하는 일들은 유사 이래로 계속되어 왔지만 인류의 역사를 바꾸어 버린 경우는 자유주의의 원천인 "프랑스혁명"에 다이아몬드목걸이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으로, 참으로 흥미있는 일이다.

'목걸이사건'은 루이 15세 때에 이미 그 서막이 오른다. 당시 왕실출입의 보석 세공사였던 샤롤 오기스트 베머와 폴 바상지는 세계 최고급의 다이아몬드 647개가 완전한 조화를 이루면서 배열된 훌륭하고 아름다운 목걸이를 만들었다.

당시의 국왕인 루이 15세가 그의 애인인 듀 바리 부인에게 이 목걸이를 선물하리라고 확신했던 그들은 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통해 목걸이를 팔수 없게되자 빚더미에 앉게 된다.

그들은 목걸이의 다음번 주인으로 루이 16세와 사치와 방탕한 생활로 전유럽에서 화제가 되고 있었던 아름다운 왕비 마리 앙뜨와네뜨에게 희망을 걸었다.

목걸이의 아름다움에 반해 버린 루이 16세는 마침 갓 출산한 왕비에게 이 목걸이를 선물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마리 앙뜨와네뜨는 그녀답지 않은 분별력을 보였고, 왕도 현명한 사람이어서 목걸이보다는 국민을 위하여 돈을 써야 한다며 목걸이를 반환한다.

베머와 바상지는 마리 앙뜨와네뜨의 마음을 돌려 보려고 수년간을 설득했다.

그들은 왕비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애원도 했지만, 왕비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고 목걸이는 여전히 팔리지 않고 남아 있었다.

그러던 1785년 이들 절망한 보석세공사들에게 낭보가 날아든다. 일찍부터 왕비의 심복이며 친구라고 소문이 난 모트 부인에게서 어떤 영주가 이 목걸이를 사고 싶어한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젊고 아름다운 모트 부인은 대담하고 치밀하게 역사적인 대 서사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가 보석 세공사들에게 소개하려고 한 영주는 교회의 추기경 루이 로안이었는데, 그는 왕비의 총애를 잃게 되자 원래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전전긍긍하던 터였다.

아름다운 모트 부인은 남편의 적극적인 협력을 얻어 여러가지 방법으로 추기경을 유혹했다.

그와 잠자리를 함께하는 동안 그녀는 자신이 왕비의 친한 친구이기 때문에 그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을 완전히 믿게 했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암흑가를 돌아다니며 마리 앙뜨와네뜨와 체형이 닮은 매춘부를 발견하고 가짜 왕비의 역할을 시켜 어둠속에서 밀회를 나누도록 일을 꾸민다.

추기경과 가짜 왕비와의 대면은 정말이지 잠깐이었다.

가짜 왕비는 "당신은 이것이 뭘 의미하는 것인지 아시겠죠?"라는 수수께끼같은 말을 남기고 그에게 장미꽃 한송이를 건네주었을 뿐이다.

추기경이 왕비의 발 아래 몸을 던지자 그녀는 밤의 어둠속으로 서둘러 도망쳐 갔다.

이러한 연극을 한 다음 모트 부인이 추기경에게 "베머와 바상지가 만든 아름다운 목걸이를 사기 위한 왕비의 대리인 역을 해 주실 수 없을까요?" 하고 부탁하자 추기경은 왕비의 환심을 사기 위해 흔쾌히 승낙한다.

목걸이를 손에 넣은 모트는 곧 목걸이를 해체하여 팔찌, 펜던트, 반지에 끼워 자기 것으로 만들고 남은 다이아몬드를 팔아서 값비싼 가구와 사치스러운 옷을 사고 왕족이 타고 다니도록 화려하게 장식된 4륜마차를 타고 돌아다녔다.

추기경은 왕비가 감사의 표시로 그 어떤 신호를 보내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허사였다.

게다가 보석 세공사들은 대금의 지불을 독촉했다. 결국 보석세공사 베머는 마리 앙뜨와네뜨로부터 직접 목걸이 값을 받기 위해 그녀에게 간다.

교묘하게 계획된 사기 수법은 당장 드러났다. 루이 16세는 사건을 공표하지 않고도 그들을 벌할 수 있었지만 그들에게 공식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부여했다.

왕과 왕비에게 이 재판정은 돌이킬 수 없는 화근이 되는 것을... 증언대에 선 모트는 자신이 욕심많고 은혜를 모르는 왕비의 희생자라고 거짓말을 해대며 왕비를 비난했고, 그의 이 비난은 당시의 사회적 흐름속에서 마약처럼 녹아 들었다.

마리 앙뜨와네뜨는 이미 "베르사이유의 매춘부"로 알려져 있었고, 귀족사회는 썩을 대로 썩었고 백성들은 굶주림에 지쳐 있었으므로 프랑스 시민들에게는 모토를 믿으려하는 풍조가 커져 갔다.

또한 로안 추기경의 재판 때에 재판관들이 사용한 말은 훗날 마리 앙뜨와네뜨를 감옥에 잡아넣는 불같은 소동에 부채질을 하게 된다.

판결문은 대략 이런 내용이다. "우리는 로안 추기경이 계획에 동의한 사실로 범죄를 예측했다고 해서 유죄로 판결할 수는 없다.

마리 앙뜨와네뜨는 경박하고 무분별하다는 평판이 있는 남녀를 좋아하고 곁에 두고 있으므로, 우리로서는 추기경이 그렇게 생각해도 하는 수없다."

혁명의 발걸음은 이 사기극에 의해 더욱 빨라졌다. 혁명의 지도자였던 가르비엘 드 미라보와 같은 권위자는 이 목걸이사건을 "혁명의 전주곡"이라고 명명했다.

결국 불운한 왕 루이 16세와 마리 앙뜨와네뜨는 이 목걸이 사건으로 인해 어떻게도 할 수 없는 희생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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