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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주의 이름이 새겨진 다이아몬드 - "Shah(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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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ewha 댓글 0건 조회 1,015회 작성일 11-01-29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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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다이아몬드는 다른 것들처럼 연마된 상태가 아니다.

최초에는 95캐럿이었던 원석의 일부분만이 연마되어 현재는 88.7 메트릭 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되어 있으며, 색은 약간 황색감이 들어있으나 인도산의 다이아몬드 특징인 투명도가우수하다.

이 다이아몬드의 형태는 테이블 커트, 포트레이트 스톤, 바 셰이프등 여러 가지로 불리우고 있다. 벽개면이 3면있고, 별도로 연마한 패싯이 1면 있다.

다시말해서 이것은 몇세기전에 동양에서 행해온 현대의 취향으로 말하면 한층 원시적이라고도 말할수 있다. 다이아몬드 커트 기술로 말하면 가장 최초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샤(Shah)"는 여러가지 이유에서 흥미깊은 다이아몬드이다.
이 다이아몬드에는 3개의 벽개면에 이 다이아몬드의 소유자였던 3사람의 이름이 깨끗하게 조각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이 "샤(Shah)" 다이아몬드는 현존하는 이름이 새겨진 3개의 다이아몬드중 하나로 남아있는데,. "샤(Shah)" 다이아몬드 외에 조각이 남아있는 다이아몬드로는 83캐럿의 "자항기르(Jahangir)와 "다랴이누르(Daryainur)"가 있다.

한편 "샤"에 기록되어 있는 이름을 보면 이 다이아몬드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다.

제 1의 기록은 모스렘 1000년, 다시말해 서기 1591년의 것으로 아마도나갈의 지배자였던 불항Ⅱ세에 관련된 것이다.

이 오래된 왕국은 인도의 데칸고원 북서쪽에 위치해 있었는데 1636년에 무갈제국의 샤·자항에 정복되었다.

2번째의 이름은 "자항기르·샤"의 아들인 "자항·샤-1051" 이라고 읽혀지는데 이것은 1641년의 일이다.

샤·자항(1628-1658)은 말할 것도 없이 아그라의 타지·마할을 건립하였던 지배자였다. 후계자 문제로 소동이 있었으나 4명의 아들중 3째였던 아우란제브 (1658-1707)가 뒤를 이어 이 다이아몬드도 그의 손에 넘어갔다.

1665년 프랑스의 유명한 여행가이자 보석감정사이기도 한 타베르니에는 황제의 궁전을 방문하여 그 정경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왕의 거처에서 보아 반대쪽에 놓여져 있는 옥좌(玉座)의 옆에는 80∼90 캐럿의 다이아몬드 주위에 루비나 에메랄드를 셋팅한 뛰어난 보석들이 보인다.

임금이 옥좌에 앉으면 이 보물이 눈에 가득차 들어온다."라고...... 이 다이아몬드는 거의 틀림없이 "샤"인 것으로 판단된다.

"샤"의 상부의 가장자리 주위에는 작은 구멍이 파여있는데, 이것은 이 다이아 몬드를 매달고자 할 때 끈을 고정시키기 위한 것으로 생각되어 진다.

3번째의 이름은 1824년에 페르시아의 지배자였던 파테·아리·샤(1797∼1834)였다. 페르시아인들은 이 다이아몬드를 나딜·샤가 지휘한 1739년의 인도 침략뒤에 손에 넣었을 것이다.

이 때 페르시아군은 데리를 약탈하고, 보석은 물론 많은 전리품을 빼앗아 갔다. 그 중에 그 유명한 코이누르 다이아몬드도 포함되어 있었다. 코이누르가 결국 영국에 넘어가는 것에 반대하여 "샤"의 경우는 러시아 왕실의 보석품이 됐던 것이다.

"샤"가 어떻게 해서 러시아 왕실의 소유가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2가지의 다른 설(說)이 있다.

하나는 "파테·아리·샤"가 1843년에 페텔부르크를 방문할 즈음에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Ⅰ세에게 기증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위대한 다이아몬드를 소유하는 것을 동양의 군주들이 어느정도 명예라고 생각하고, 또 가치를 생각하면 이와같은 귀중한 보석을 선물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또 하나의 설(說)은 러시아인도 동의하고 있는 것으로 매우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러시아와 페르시아 사이에 분쟁이 있어 1827년에 전쟁이 발생하였다.

최초에는 페르시아가 파죽지세로 승승장구하여 많은 영토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파테·아리·샤가 겨울동안의 급료를 지불하지 않아 대부분의 군인이 해산해 버려, 거기서 러시아는 터기만챠이 조약을 밀어붙였다.

이 조약의 체결을 완벽하여 성공시켜 러시아에 큰 영토를 차지하게 한 것이 외교관이자 극작가였던 알렉산도르·세르게이비치 그리보도후였다.

그는 운문의 풍작극 "머리가 좋은 것이 불행한 것"의 작가로서 잘 알려져 있다. 그리보도후는 포상을 받은후 페르시아 公使에 임명되었다.

그는 단호하게 터키만챠이 조약을 집행하고자 하였으나 페르시아인들은 이 조약을 과혹이라고 생각하여 그리보도프에게 한(恨)을 품는 정도까지 되었다.

더욱이 2명의 아르메니아 여성이 샤의 하-렘으로부터 탈주하여 러시아 공사관에 도망쳐버렸다고 한다.

거기에 사태를 악화시키는 사건이 생겼다.

원래 그녀들은 러시아·아르메니아 출신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고싶어했기 때문에 그리보도후로서는 감금할 수밖에 없었으나 이것이 불에 기름을 붓는 결과를 초래하여 군중들이 공사관을 습격하여 그리보도후를 살해해 버렸다.

이것이 1829년 1월 30일의 일이다.

파테·아리·샤는 이 사건에 대하여 "매우 나쁜 일의 징조"로서 생각하고,"샤" 다이아몬드를 니콜라이 Ⅰ세에게 증정해 버린 것이다.

결국 "샤" 다이아몬드가 니콜라이 황제를 회유시켰을 뿐만 아니라 양국간의 전쟁을 종전시키는 데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14년 이 다이아몬드는 페텔부루그의 화이트·팔레스의 다이아몬드룸에서 모스크바로 이전되어 보관되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후 보석을 넣어두었던 창고가 개방되어 "샤"를 확인하였고 현재도 "샤" 다이아몬드는 러시아 다이아몬드 재단이 보관하고 있는 가장 중요하다.

이아몬드의 하나로서 크레물린 궁전에 전시되어 있다.

금후에도 이 역사적인 다이아몬드를 커트하려고 하는 사람이 결코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틀림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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