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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적 로맨스를 흩뿌린 셀러브리티의 패션 아이콘은 구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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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타라곤 댓글 0건 조회 3,009회 작성일 12-06-05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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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ad No1. From Guccio To Gucci
재클린 케네디, 그레이스 켈리, 오드리 헵번… 세기적 로맨스를 흩뿌린 셀러브리티의 패션 아이콘은 구찌다. 1921년 이탈리아 피렌체에 첫 번째 숍을 열며 시작된 역사는 올해 91년이 됐다. 첫 걸음은 이탈리아에서 내디뎠지만 창업자 구찌오 구찌의 열정은 영국 런던에서 시작된다.
1898년 집을 떠나 영국 런던의 사보이호텔에서 일하던 구찌오 구찌는 당시 귀족과 상류층의 문화, 고급 가죽제품에 관심을 갖고 이탈리아로 돌아와 가죽 다루는 법을 배우고 익혔다. 자신의 이름을 딴 작은 가방가게 ‘구찌’는 세련된 귀족문화와 토스카나 장인의 숙련된 솜씨가 어우러져 번성했다. 그야말로 탄탄대로였다. 일례로 1932년에 만든 구찌의 클래식모카신은 현재 뉴욕 MOMA에 전시될 만큼 당시 부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엄청난 성공을 거둔 젊은 디자이너이자 사업가 구찌오 구찌는 1937년 워크숍을 확장하며 핸드백과 가방, 장갑, 신발, 벨트 등 다양한 컬렉션을 선보인다.
주 고객인 상류층의 라이프스타일에 주목하다 그들만의 스포츠로 각광받던 승마에서 디자인 영감을 얻었고 그렇게 탄생한 홀스빗(말 재갈) 장식과 등자(발안장) 장식 등은 구찌의 고유한 상징이 됐다. 이후 투스카니의 귀족 가문과 부유한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명성을 얻기 시작한 구찌 아틀리에는 패션의 대명사이자 패셔너블한 라이프스타일을 제시하는 명소가 됐다.
아이러니하지만 구찌의 패션감각은 파시스트 독재정권하의 어려운 시기에 빛을 발한다. 모든 물자가 전쟁을 위해 사용되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제품 생산에 부족한 물자를 대체하기 위해 내세운 대마, 리넨, 황마, 대나무 등의 소재가 빅 히트로 이어졌다. 특히 가죽 대신 대마에 다이아몬드 패턴을 입힌 ‘디아만테(Diamante) 캔버스’와 1940년대 후반에 소개된 ‘뱀부(Bamboo)백’은 구찌 역사상 가장 독보적인 베스트셀링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다. 1951년엔 구찌의 브랜드 시그니처인 그린-레드-그린 컬러의 GRG웹이 탄생한다.
구찌오 구찌는 1953년 사망하기 전까지 직접 회사를 관리하며 네 아들(알도, 바스코, 우고, 로돌포)을 주주로 참여시켰다. 바로 그 해 뉴욕에 진출하며 가장 먼저 미국 시장에 발을 내디딘 이탈리아 브랜드가 됐고, 이후 런던, 팜비치, 파리, 베벌리힐스 등에 매장을 오픈해 확고한 명품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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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ad No2. 비극 그리고 회생
뜨는 태양의 이면엔 어두운 그늘이 존재하는 법. 구찌의 명성과 영광 뒤엔 구찌家 2, 3세들의 알력다툼이 드라마틱하다. 오죽하면 <블레이드 러너> <글래디에이터> <블랙호크다운> 등을 연출한 리들리 스콧 감독이 여배우 앤절리나 졸리를 내세워 영화화하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가문의 반대로 영화화는 답보상태에 놓였지만 덕분에 구찌家의 비극은 다시금 대중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구찌는 1953년 창업주 구찌오 구찌가 세상을 떠난 후, 네 아들 중 알도와 로돌포가 각각 50%씩 회사의 경영권을 갖게 된다. 배우로 활동하기도 했던 로돌포에 비해 둘째 아들 알도는 브랜드의 뉴욕 진출, 홍콩과 도쿄 공략, 브랜드의 상징이 된 GG 로고 등 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79년엔 구찌 액세서리 컬렉션을 론칭했고 향수 사업과 브랜드 라이선스 사업도 시작한다.
이른바 1970년대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경영과 관련해 매장 운영과 재산 상속 등 가문의 알력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저렴한 가격대의 세컨드 브랜드 ‘구찌 플러스’ 론칭이나 라이선스 남발 등으로 ‘제 살 깎아먹기’란 비판에 직면했다. 덕분에 그 동안 쌓은 명성도 차츰 옅어지기 시작한다. 집안 문제로 앙심을 품은 아들이 아버지 알도를 국세청에 고발하며 철창신세를 졌고 구찌는 심각한 재정난을 겪게 된다.
1982년 가족 경영진의 전략적인 결정으로 주식회사가 된 구찌는 로돌포의 아들 마우리치오에게 경영을 맡긴다. 하지만 마우리치오는 1989년 앵글로-아랍계 소유의 투자회사 인베스트코에 가족들의 지분 50%를 넘겼고 1993년 자신이 보유한 나머지 지분까지 매각하게 된다. 이후 마우리치오는 1998년 전 부인의 청부살인으로 사망했다.
투자회사 인베스트코가 지분을 매입한 구찌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통해 회생의 길로 들어선다. 구원투수로 나선 이는 1990년부터 구찌의 여성복 디자인을 담당해온 미국 출신 디자이너 톰 포드와 구찌 아메리카의 수석이었던 도메니코 드 솔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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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ad No3. 톰 포드 & 드 솔레
1994년 크리에이티브 디자이너가 된 톰 포드와 1995년 회장이자 CEO로 임명된 도메니코 드 솔레. 이 두 사람의 지휘 아래 구찌는 새로운 패션 시대를 열게 된다. 홀스빗 모카신은 스틸레토로, 밝은 컬러의 실크 새틴 셔츠는 몸에 피트되도록 재단됐다. 바지는 로 웨이스트나 힙에 걸치는 디자인의 벨벳 소재로 변신을 거듭했다. 이러한 변화에 재클린 케네디, 그레이스 켈리, 오드리 헵번의 계보는 마돈나, 니콜 키드먼, 귀네스 펠트로, 요르단의 라니아 왕비, 스팅, 톰 크루즈, 브래드 피트로 이어지며 다시금 세계 각국의 귀족과 왕족, 셀러브리티가 사랑하는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이름하여 구찌의 제2의 전성기다.
톰 포드가 총괄한 구찌의 디자인은 그동안 올드한 이미지를 벗고 젊고 섹시한 이미지로 거듭났다. ‘모든 화려한 것들을 표현하는 최우선 요소는 편안함과 단순함’이란 그의 철학은 구찌의 모든 컬렉션에 반영됐다.
1998년 유럽언론협회는 구찌의 뛰어난 경영성과를 높이 평가해 ‘올해의 유럽기업’으로 선정한다. 이듬해에는 PPR(Pinault-Printemps-Redoute)그룹과 전략적 제휴를 맺어 브랜드가 아닌 대기업 구찌그룹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구찌는 이브생로랑, 이브생로랑 보떼, 세르지오 로시, 보테가 베네타, 부쉐론, 알렉산더 맥퀸, 스텔라 맥카트니, 발렌시아가, 베다 등 중요한 브랜드들을 인수하며 구찌 그룹의 포트폴리오를 강화한다. 이 브랜드들은 지금도 여전히 구찌와 함께하고 있다.
 
Road No4. 구찌전쟁 & 프리다 지아니니
새로운 세기에 명품업계를 뜨겁게 달군 이슈 중 하나는 구찌전쟁이다. M&A 큰손인 베르나르 아르노 LVMH(Louis Vuitton-Moet-Henessy) 회장이 10여년 간 “구찌는 좋은 브랜드다. 그들이 나와 함께 하길 바란다”며 끊임없이 러브콜을 보냈던 것. 아르노 회장은 14억 달러를 들여 구찌 주식 34.4%를 매수해 은밀히 인수 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게 구찌를 넘겨 줄 순 없다고 생각한 도메니코 드 솔레 구찌 회장은 프랑수아 피노 PPR 회장에게 구조 신호를 보냈다. LVMH의 공세에 백기사가 돼 줄 것을 요청한 것. 구찌의 잠재력을 믿고 기꺼이 인수에 나선 PPR은 2004년 7월 99.4%의 지분을 획득하며 암스테르담과 뉴욕 증권거래소에 구찌의 상장을 폐지했다. 명품업계 M&A의 거인 LVMH를 상대로 한 한판승이었다. 이 일이 있기 전 아르노 회장과 피노 회장이 서로 집안 대소사에 참석하며 친분을 과시했었다니, ‘비즈니스 세계에 적과 동지는 없다’는 격언이 실감나는 사건이다.
PPR이 구찌그룹을 인수한 뒤 톰 포드와 도메니코 드 솔레는 계약이 만료되며 회사를 떠난다. 하지만 패션업계 일각에선 “LVMH의 공세에 회사를 지켜낸 두 사람의 목소리가 커지자 PPR과 마찰이 생긴 것 아니냐”는 말이 돌기도 했다.
드 솔레 후임으로 구찌그룹을 이끈 이는 로버트 폴렛. 그리고 마크 리가 구찌의 사장에 취임한다. 구찌의 디자인은 3명의 디자이너가 각각의 라인을 담당했다. 존 레이(남성라인), 알렉산드라 파치네티(여성라인), 프리다 지아니니(액세서리라인)가 주인공이다. 이후 2005년 여성복과 액세서리 라인을 총괄하게 된 프리다 지아니니는 2006년 구찌 브랜드 총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되며 톰 포드 이후 구찌를 이끌고 있다.
마크 리의 리더십과 지아니니의 디자인을 바탕으로 구찌는 초심으로 돌아간다. 과거 구찌의 아이콘들이 다시 연구되면서 현대적인 감각에 에너지를 더하게 된다. 특히 최고급 가죽위에 구찌의 GG 로고가 프린팅된 시그니처 레더 컬렉션 ‘라 펠르 구찌시마’ 라인은 GG 로고와 홀스빗 모티브가 새겨진 두 가지 스타일로 론칭되며 또 다른 아이콘으로 등극했다.
톰 포드가 섹시한 관능미로 위기를 헤쳐 갔다면 프리다 지아니니는 여성 특유의 부드러움과 섬세함으로 구찌의 새로운 시그니처 스타일을 확립했다. 덕분에 2005년부터 2008년까지 구찌는 4년 동안 46% 성장하며 20억 유로 이상의 이익을 냈다. 전 세계 주요 도시에 258개의 직영 매장과 단독 부티크를 오픈했고 중국 등 신흥시장에도 영역을 확장했다.
2009년 1월부터 마크 리에 이어 구찌를 이끌고 있는 이는 보테가 베네타의 CEO를 역임한 파트리지오 디 마르코. 구찌 그룹 경영 위원회의 일원으로 활동한 파트리지오 디 마르코 사장은 유럽과 미국, 아시아 시장의 성장을 이끌고 있다.
패션전문가들은 구찌의 성공요인으로 ‘100% 이탈리아 제작’을 고집하는 브랜드 이념을 꼽는다. 몇 세대에 걸쳐 숙련된 이탈리아 장인의 정교함에 끊임없는 투자와 전략이 더해져 트렌드를 선도한다는 것이다. 2007년 닐슨컴퍼니의 리서치 조사에 따르면 구찌는 세계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럭셔리 브랜드로 평가됐고 2008년엔 글로벌 브랜드 컨설팅 그룹 인터브랜드의 ‘Best Global Brand 2008’에서 전 세계 산업 중 가장 가치있는 45번째 브랜드로 선정됐다. 이는 이탈리아 브랜드 중 가장 높은 순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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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ad No5. 구찌 아이콘
THE BAMBOO
1947년 이탈리아 피렌체의 구찌 아틀리에에서 탄생한 ‘뱀부 핸드 백’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이탈리아를 생존하게 한 장인정신과 디자인의 상징이다. 열로 휘어진 대나무가 4개의 메탈 루프(자연소재인 대나무 원형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금속 가공을 최소화했다)를 통해 가방에 고정된 디자인 혁신이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다.
패션 아이콘으로 손꼽히는 또 다른 제품 중 하나는 ‘Jackie O’백이다. 1950년대 첫 선을 보였고 백의 디자인을 특별히 좋아한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의 이름에서 유래돼 오늘날까지 구찌의 베스트셀링 아이템으로 남아있다.
뒤이어 선보인 홀스빗 디테일의 클래식 모카신은 패션 액세서리 디자인의 기념비적 사례로 MOMA 의상연구소에 전시돼 있다. ‘호보백’ 역시 클래식 모카신을 잇는 중요한 디자인. 부드럽고 형태가 잡혀있지 않은 유연한 실루엣과 유니섹스적인 스타일로 리즈 테일러, 사뮈엘 베케트, 피터 셀러스 등 셀러브리티의 사랑을 받았다. 그 후 몇 년 동안 구찌는 홀스빗(말 재갈) 장식, 등자(발안장) 장식, GRG(Green-Red-Green) 웹장식, 인터로킹 더블 G, 크레스트 장식 등 기존 아이콘 모티브들의 트렌디한 응용과 패셔너블한 조합을 연구했다. 구찌오 구찌에 의해 디자인된 크레스트 장식은 투구를 쓰고 가방과 장미를 든 기사. 우아한 중세의 미학을 추구하는 브랜드 철학인 담긴 시그니처다.
 
Road No6. PPR(Pinault-Printemps-Redoute)
재산 115억 달러(약12조원)로 전 세계 갑부 순위 67위인 프랑수아 피노 프랑스 PPR(피노-프랭탕-르두트) 그룹 명예회장은 구찌, 알렉산더 매퀸, 발렌시아가를 비롯한 여러 명품 브랜드와 1등급 와인 샤토 라투르를 소유하고 있는 세계적인 거부다. 미술계에서도 가장 영향력 있는 컬렉터로 손꼽힌다. 피노 명예회장은 프랑스의 외진 시골에서 자란 자수성가형 억만장자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아버지의 제재소에서 일을 돕다 27세에 소시에테피노라는 이름으로 세운 목재 유통회사가 PPR그룹의 모태다. 1991년 가구가전 유통업체 콩포라마를 인수하며 유통업에 진출해 프랑스 1위 백화점 쁘렝땅(2006년 이탈리아 보르레티 가문에 매각)과 통신판매회사 흐두뜨, LVMH의 아르노 회장이 그토록 원하던 구찌까지 손에 넣었다. 구찌를 인수한 뒤 그룹 이름은 PPR로 바뀌었다. 1993년에는 영국 피어슨그룹으로 넘어갔던 와이너리 샤토 라투르의 소유권을 프랑스로 되찾아왔고 2007년엔 독일 스포츠 브랜드 푸마도 손에 넣었다. 2003년 아들 프랑수아 앙리 피노에게 회장직을 넘기곤 현재 미술계의 가장 큰손으로 활동하고 있다.
피노 회장은 1998년에 세계적인 미술품 경매회사 크리스티를 인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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