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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세자빈, 외모에서 확실히 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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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미 댓글 0건 조회 564회 작성일 15-07-20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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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실 여성들 중에서 외모를 가장 중요시 하지 않았던 이들은 세자빈 출신이었다. 처음부터 왕비나 후궁으로 입궁한 여성들보다는, 처음부터 세자빈으로 입궁한 여성들의 외모가 비교적 떨어진 것이다. 조선시대 여성관(觀)을 살펴보면, 이 점을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여성을 평가할 때 외모를 먼저 보고, 지성이나 품성은 그 다음에 본다. 고 다이애나 영국 왕세자빈이나 샤를렌 모나코 왕비를 거론할 때마다, 한국 언론에서는 그들의 수려한 외모부터 거론하는 경우가 많다.



▲세자빈(황태자비) 출신인 순정효황후 윤씨, 순종황제의 부인이다. 서울 남산한옥마을에 전시된 사진이다.
ⓒ 김종성

조선시대 분위기는 달랐다. 조선시대에 여성을 평가하는 최고의 기준은 덕성이었다. 남자의 눈을 매혹할 만한 미모를 가진 여성보다는 어질고 인자해 보이는 여성에 대해 보다 높은 가치를 부여한 것이다. 다음으로 중시한 것은 지성이고, 외모는 맨 끝이었다.

이 때문에, 마음속으로는 섹시한 여성을 좋아하는 남자일지라도, 겉으로는 그런 속내를 드러낼 수 없었다. 외모를 따지는 것 자체가 인격적 부족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성·외모보다는 덕성을 중시하는 풍토는 왕비·후궁·세자빈 같은 왕실 여성을 평가할 때 훨씬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일례로, 제4대 세종의 부인인 소헌왕후 심씨는 실록에서 대단한 격찬을 받았다. 탁월한 덕성의 소유자라는 평가를 받은 것이다. 문종 2년 4월 1일자(1452년 4월 20일) < 문종실록 > 에 따르면, 심씨는 어질고 착하고 인자하고 성스러운 여성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여성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격찬을 받은 셈이다.

제11대 중종의 부인인 장경왕후 윤씨는 탁월한 지성의 소유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윤씨의 일생을 정리한 < 장경왕후 지문 > 에 따르면, 그는 경전과 역사서에 통달한 지적인 왕후였다. 하지만, 지성미가 넘친다는 평판은 그다지 후한 평가는 아니었다. 덕성의 소유자라는 평가가 최고였다.

이런 사회 풍토는 왕이나 세자의 배우자를 선발할 때에 힘을 발휘했다. 지성이나 미모를 가진 여성보다는 덕성을 갖춘 여성이 왕비·후궁·세자빈으로 뽑힐 가능성이 컸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 힘을 실어준 제도적 요인이 있었다. 신붓감을 간택하는 심사위원들이 여성들이었다는 점이다.

왕이나 세자의 어머니 혹은 할머니가 심사를 주도했기 때문에, 신랑 본인보다는 나이 든 여성들의 마음에 드는 후보가 뽑힐 가능성이 컸다. 이로 인해, 왕비·후궁·세자빈 자리는 원칙상 덕성의 소유자로 보이는 여성들에 의해 채워질 수밖에 없었다.


왕비·후궁·세자빈의 외모 차이


▲< 옥탑방 왕세자 > 의 세자빈인 화용(정유미 분).
ⓒ SBS

그렇다고 해서 왕비·후궁·세자빈 선발이 언제나 덕성 위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예외적이기는 하지만, 남자의 눈을 매혹할 만한 섹시한 여성들이 뽑히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런 예외가 발생할 가능성은 후궁 선발에서 가장 높았다. 그다음은 왕비 선발이었다. 맨 마지막은 세자빈 선발이었다. 다시 말해, 남자 눈에 예쁜 여성은 후궁 출신 중에 '그나마' 가장 많았고, 왕비 출신 중에 그다음으로 많았고, 세자빈 출신 중에는 거의 없었다.

섹시한 여성이 왕비·세자빈보다는 후궁 중에 많았다는 점은 중종과 숙종 때 사례에서도 나타난다. 중종의 후궁 중에 홍희빈(희빈 홍씨)이 있었다. 홍희빈은 실록에서 '여색'이라고 평가했을 정도로 상당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그는 남자가 보기에 예쁜 여성이었다.

중종 13년 3월 12일자(1518년 4월 21일) < 중종실록 > 에 따르면, 중종은 홍희빈을 특별히 가까이한다는 이유로 사헌부(검찰청) 정4품 관료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았다. 중간 관료한테 '여색에 빠지는 자는 용렬한 임금'이란 욕을 들은 것이다.

숙종의 부인인 장희빈(희빈 장씨)이 후궁이 될 때도 그런 소동이 있었다. 장희빈 역시 실록에서 미모를 인정한 여성이다. 장희빈이 후궁에 책봉될 조짐이 보이자, 조정에서는 숙종에게 "미인을 경계하시라"는 상소를 올렸다. 이런 사례들에서 알 수 있듯이, 너무 예쁜 외모 때문에 물의를 일으킨 여성들은 거의 다 후궁이었다.

후궁 쪽에 섹시한 여성들이 상대적으로 많았던 것은, 왕이 후궁 선발에 대해서만큼은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후궁 선발도 왕실 여성들이 주관했다. 하지만, 왕권이 안정된 뒤에는 왕도 발언권을 행사할 여지가 있었기 때문에, 남자 눈에 예쁜 후궁이 등장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세자빈, 섹시한 여성 뽑히기 힘들었다



▲세자빈이 될 뻔했던 < 옥탑방 왕세자 > 의 부용(한지민 분).
ⓒ SBS

이에 반해, 세자빈 선발에서는 섹시한 여성이 뽑히기가 구조적으로 힘들었다. 세자빈을 맞이하는 세자의 나이는 보통 열 살 안팎이었다. 나이가 어린지라, 세자들은 어머니나 할머니가 골라주는 배우자와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 신랑의 의사가 반영될 가능성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왕비 선발 역시 왕실 여성들이 주관했다. 하지만 세자빈 선발에 비하면, 신랑 본인의 의사가 좀 더 반영될 가능성이 높았다. 세자와 왕의 지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제24대 헌종의 사례가 그 점을 입증한다.

헌종은 열일곱 살의 나이로 재혼했다. 이때 헌종은 자기도 간택 심사장에 나가고 싶다는 의사를 강력히 피력했다. 이것은 관행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신랑 본인은 심사에 참석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헌종의 고집이 통한 것은 이때 헌종이 집권 11년 차였기 때문이다. 왕이 하도 고집을 피우니, 왕실에서도 막을 길이 없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왕들은 왕실 어른들이 지정해준 왕비와 결혼했지만, 이처럼 경우에 따라서는 왕의 의사가 왕비 선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후궁 선발에 비해 왕비 선발에서는 왕의 의사가 훨씬 더 제약될 수밖에 없었다. 왕이 자기 마음에 드는 후궁을 뽑을 때에 생기는 반발보다는, 왕이 자기 마음에 드는 왕비를 뽑을 때에 생기는 반발이 훨씬 더 컸다.

조선시대에는 축첩제도를 부정했기 때문에, 후궁의 지위가 공식적으로 인정될 수는 없었다. 후궁의 공식 지위는 궁녀에 불과했다. 일반 궁녀들과 달리 종4품 이상의 고위직 궁녀에 임명되었을 뿐이다. 후궁의 공식 지위는 궁녀였으므로, 섹시한 후궁이 나온다 해도 왕실의 체면이 깎일 여지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왕비는 달랐다. 왕비는 곧 국모이기 때문에, 섹시한 여성이 국모가 되는 것은 왕실의 수치로 인식되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왕이 섹시한 후궁을 뽑으려 할 때 생기는 반발보다는 섹시한 왕비를 뽑으려 할 때 생기는 반발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후궁을 선발할 때보다는 왕비를 선발할 때에 왕의 의사가 훨씬 더 제약될 수밖에 없었다.

위와 같이, 세자빈 선발보다는 왕후 선발에, 왕후 선발보다는 후궁 선발에 신랑 본인의 의사가 반영될 가능성이 좀 더 높았다. 그래서 세자빈보다는 왕후 중에 섹시한 여성이 있을 확률이 그나마 좀 더 높았고, 왕비보다는 후궁 중에 섹시한 여성이 있을 확률이 그나마 좀더 높았다.

세자빈 출신의 왕실 여성들의 외모를 중요시 하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세자빈은 할머니나 어머니의 마음에 드는 여성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자기 마음에 드는 배우자와 결혼하고 싶은 세자는, 어떻게든 좀 더 버티다가 왕이 된 뒤에 결혼하는 게 상책이었다.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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