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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수필 : 신뢰를 깨지 마세요 [독일/유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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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5,088회 작성일 10-04-26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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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유한나] 신뢰를 깨지 마세요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내어 집 근처에 있는 넓은 들판길을 거닐며 산보를 하고 있었다. 저만치 한 젊은 아가씨가 꽃밭에서 이 꽃 저 꽃을 꺾으며 한 다발 꽃묶음을 만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주인도 없는데 마음대로 꽃을 꺾는 것일까? 그 동안 독일에는 도둑이 별로 없다는 인상을 갖고 살았었는데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밤도 아닌 환한 대낮에, 그것도 험상궂게 생긴 남자가 아닌 예쁘게 생긴 아가씨가 남의 꽃을 따서 한 묶음 꽃을 만들어 가져간다는 것이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꽃가게에서 사는 꽃값이 비싸서 그랬을까? 신뢰를 깨지 마세요



길게 뻗어 있는 꽃밭길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나는 조그만 팻말과 그 앞에 놓인 동전통을 볼 수 있었다. 그 팻말에는 아무나 꽃을 스스로 원하는 대로 꽃 묶음을 만들어 가되, 꽃값을 동전통에 넣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꽃 종류대로 꽃값이 적혀져 있었다. 꽃가게에서 사는 것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인 것은 물론이었다. 내 가슴에 와 닿았던 귀절이 끝에 덧붙여져 있었다. 우리 가족은 여러분을 신뢰합니다. 꽃을 가져가시는 여러분도 우리의 신뢰를 깨뜨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 그랬구나. 그 젊은 아가씨는 이 꽃밭 주인 가족의 신뢰대로 꽃을 즐거이 따모아 사랑하는 사람에게 줄 꽃 묶음을 행복한 마음으로 만들고, 동전통에 꽃값을 넣고 간 것이었구나. 인적이 드문 들판길이라 누구든지 꽃만 가져가고 꽃값을 내지 않은 채 가기도 쉬워 보였다. 그러나 어느 누가 신뢰로 가득 찬 주인 가족들의 아름다운 마음을 감히 실망시킬 수 있었을까. 직접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신뢰와 행복의 씨를 사람들의 마음에 뿌리고 있는 꽃밭 주인 가족들의 아름다운 모습이 보이는 듯하였다. 그 후 나는 독일의 작은 소도시들이나 전원길을 지나갈 때 꽃을 스스로 꺾어 가세요 하고 세워놓은 팻말들을 가끔 볼 수 있었고 그 때마다 동네 근처의 꽃집 주인 가족들에게서 받았던 첫 감동을 되살리곤 하였다.


어느 날, 가지고 다니던 집 열쇠가 없어졌다. 아무리 가방 속과 방 안을 둘러보며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누가 집 근처 길거리에서 열쇠를 주워서 우리 빈 집에 들어오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에 부지런히 집안을 돌아보며 찾아도 그 날은 영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직장에 출근하기 전에 일간 신문을 가지러 집 대문을 열고 나갔을 때, 대문 밑에 깔아놓은 발판 밑에 뭔가 두툼한 것이 눈에 띄어 발판을 들쳐보니 내 열쇠꾸러미가 들어있는 것이 아닌가! 누가 여기에 넣어 놓았을까? 왜 초인종을 누르고 전해 주지 않고 발판 밑에 넣어 놓았을까?


다음 날 아침, 신문 배달하는 한 젊은 아가씨가 마침 신문 가지러 나오는 나에게 반갑게 인사하며 말을 걸었다. 열쇠 가져가셨어요? 제가 어제 새벽에 신문을 넣어 드리려고 이 댁에 왔을 때, 대문에 열쇠가 꽂혀 있었어요. 누가 혹시 가져갈까 봐 열쇠를 빼어 발판 밑에 넣어 두었어요. 새벽이라 초인종도 못 눌렀지요.


이렇게 고맙고 아름다운 사람이 사는 나라는 참 복된 나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장을 보고 온 후, 반찬거리나 물건들을 집안에 들여놓으려고 가끔 문에 열쇠를 꽂아둔 채 먼저 집안에 들어왔다가 물건들을 다 들여놓고 그냥 문을 닫아 버리곤 하는데 그 날도 그랬던 모양이었다. 언젠가는 문을 밖에서 열쇠로 잠근 채 열쇠를 다시 빼지도 않고 오전 내내 꽂아 두고 돌아와도 그냥 열쇠가 꽂혀 있는 때도 있었다.


나는 물건을 어디에 두었는지 깜박깜박 잘 잊어버리고 또 잃어버려서 결혼반지만 빼놓고 그나마 하나씩 받았던 결혼시계, 목걸이도 다 잃어버렸다. 결혼반지도 만약 금반지로 받았더라면 벌써 어딘가에서 잃어버렸을 텐데 예물이 적은 대신 특별히 반지만큼은 다이아 반지로 받아서 평소에 손가락에 끼지 않고 옷장 속에 넣어 반지함에 모셔놓은 덕분에 결혼 20년이 되도록 보관하고 있다.


언젠가 한 번은 또, 시내 나갈 때마다 가끔씩 들리는 빵집에서 빵을 사고 동전지갑을 그 곳에 놓아 둔 채로 왔다. 나는 한동안 보이지 않는 동전지갑이 집안 어디엔가 숨어 있겠지 생각하고 별로 찾지도 않은 채, 시내에 따로 나갈 일이 없어 근 한 달간을 집 근처에서 빵을 사 먹었다. 한 달 후 그 빵집에 들렀을 때 그 집 아주머니가 혹시 이 동전지갑 잃어버리시지 않았나요? 하며 그 지갑을 꺼내 주는 것이 아닌가. 한 달간을 보관하고 있다가 내게 다시 건네 준 것이었다. 나처럼 물건을 잘 잃어버리는 사람이 이태리나 러시아에 살지 않고 독일에 살게 된 것이 다 뜻이 있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몇 번이나 집안 살림을 다 잃어버릴 뻔했을 텐데.


서로간에 신뢰의 관계성을 맺고 또 그 신뢰의 관계성을 깊이 해 나갈 때 우리는 어려울 때에 생각지 않았던 도움을 받기도 한다. 중국 제나라 시대에 맹상군이라는 사람은 거의 3천 명에 달하는 많은 식객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 중에서 닭울음 소리를 잘 내는 사람과 개도둑을 하던 자가 있었다. 이 두 사람은 당장 쓸모가 없어 보여 식객으로 받지 말자는 주위 의견들이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에게 신뢰를 주고 식객으로 모신 맹상군은 후에 개도둑 출신의 사람의 도움으로 적의 왕이 요구하는 궁중 창고에 있는 여우털을 구해 바칠 수 있었고, 닭울음 소리를 내는 사람의 도움으로 새벽닭이 울어야 관문이 열리는 곳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어 이 두 사람의 도움으로 적으로부터 구출되는 은혜를 입게 된다.



독일은 신용과 신뢰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진 사회라는 생각이 든다. 버스표를 매번 따로 사지 않아도 버스를 탈 수 있지만 가끔 차표 조사를 하는 검사관들이 검사하여 걸릴 경우에는 차표값의 몇십 배에 달하는 거금을 벌금으로 물어야 한다. 평소에 아무리 꼬박꼬박 버스표를 사서 타도 어쩌다 한 번 차표 없이 버스를 탈 경우라도 검사에 걸렸을 때 어떠한 하소연이나 핑계도 통하지 않는다. 그만큼 신용과 신뢰를 깨뜨린 책임은 큰 것이다. 우리는 여러분을 신뢰합니다. 여러분도 우리 신뢰를 깨뜨리지 않기를 바랍니다.라는 꽃집 주인 가족들의 정신이 사회 전반에 깔려 있다. 관청이나 기업, 은행의 어떠한 중요한 서류라도 인감도장 없이 손으로 쉽게 할 수 있는 사인 하나면 된다. 그러나 만약 허위 사인이 발견될 경우, 그 벌책은 아주 큰 것이다. 신용과 그에 따른 책임이 중시되는 사회이다.


우리도 작게는 가정 안에서 그리고 크게는 사회와 나라 안에서 신뢰와 행복의 씨를 뿌려 갈 때 누구나 즐거이 우리의 꽃밭에 와서 행복의 열매를 따 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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