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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수필]어머니의 눈물 - 여강/최재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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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5,295회 작성일 10-04-01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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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야, 네가 왜 이렇게 된 거여?”

지난 설날에 뵈었던 84세의 어머니의 머리 위에 함박눈이 잔뜩 쌓여있었다. 그때는 된서리 정도 였는데, 열 달 만에 함박눈으로 변해있었다. 어머니는 뼈만 앙상한 막내아들의 손을 잡고 소리 없이 눈물을 훔쳤고, 무슨 말이라도 하여 어머니를 위로해 드려야 하는 막내아들은 그저 무안해서 장승처럼 서서 어쩔줄 몰라하며 눈시울을 붉혀야 했다.

사촌 형님들과 조카들이 어색한 모자母子 상봉을 곁눈질로 바라보며 내가 얼른 차례 상 앞으로 오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의 손을 잡고 안타까운 시선으로 자꾸 아래 위를 훑어보았다. 곁에서 둘째 형수는 민망한 표정으로 열 달만에 만난 어머니와 아들의 정경에 콧날이 시큰했는지 얼른 부엌으로 들어갔다.

지난 벌초 때도 고향을 찾지 못해 조상님들과 아버님에게 큰 죄를 지은 것 같아 며칠 동안 마음이 편치 못했다. 어제 오후 정장을 차려입은 막내아들은 핼쑥해진 거울 속의 자신을 발견하고 귀성歸省을 포기했다. 어머니에게 갑자기 회사에 비상이 걸려 못 갈 것 같다는 핑계를 둘러댔다.

혹시 당신께서 헌헌장부였던 막내아들의 몰라보게 변한 모습을 보시고 충격을 받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다른 형제들 보다 잔병치레가 유독 많았던 아들이기에 더욱 애착을 가지고 계셨다. 마음은 이미 고향에 가 있었지만 몸은 따르지 못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아아, 어찌해야하나?’

막내아들은 밤새 뒤척이며 고민하다가 아침 일찍 여주로 향했다. 소풍가는 아이처럼 가볍고 설레던 기분대신 두려운 마음이 앞섰다. 인천서 여주까지 영동고속도로를 타면 평일에는 1시간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명절이 되면 여주는 사통팔달로 뚫린 고속도로와 국도 덕분에 경상도, 강원도, 충청도로 향하는 귀성차량들로 북새통이 되어 보통 4시간이 소요되는 교통지옥으로 변하고 만다.

차안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앉아 있어야하는 시간은 5개월 전에 암 수술을 받고 치유중인 나에게는 고통의 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택한 시간이 차량통행이 비교적 한산할 것으로 판단한 추석 아침이었다. 예전에도 부득이하게 몇 번 그런 적이 있었다.

추석 아침인데 차량들은 신갈부터 용인 에버랜드까지 지체와 정체를 반복하였다. 나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차례지내기 전에 여주에 도착해야 하는데......‘ 차는 거북이보다 더 느렸다.

아침 9시30분, 2시간 20분 만에 여주 점봉리 고향집에 도착하였다. 마침 어머니와 형수는 막 차례 상을 준비하고 있었다. 지난 수십년간 설날과 추석날, 아버지 형제들과 혈육(사촌형, 조카)들은 능현리, 신산말, 점봉리 등지로 옮겨 다니며 조상님들에게 차례 상을 올렸다.

그 중 함께 조상님의 차례 상을 올리던 큰아버지 두 분과 큰 어머니 한분 그리고 아버지와 형님이 각각 현고학생顯考學生과 현비유인顯妣孺人의 이름으로 후손들의 차례 상을 받는 신분이 되었다. 이번 추석 차례에 참석하지 못한다던 삼촌을 발견하고 조카들이 달려 나왔다.

막내아들의 전화를 받고 우울해 하시던 백발의 어머니는 선물꾸러미를 들고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 막내아들을 보는 순간 희비喜悲의 감정이 어머니의 얼굴에 교차하였다. 막내아들은 지난 4월말 청천벽력 같은 위암 진단을 받고 위의 1/2이상 절제하는 대수술을 받았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어머니에게 형제자매들은 어머니가 받을 충격을 감안하여 막내가 단순한 병으로 잠시 입원하였다고 했다.

그리고 막내아들은 회사 일을 핑계로 고향을 찾지 않았다. 13kg이나 빠진 몸무게로 겨울나무처럼 변한 아들의 모습에 어머니는 조용히 눈물을 닦았다. 차례를 지내기 위하여 모인 사촌형님들과 조카들을 의식해서 인지 어머니는 눈물을 삼키는 듯 하였다. 나는 어머니에게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하였다.

아버지에게 술잔을 올리고 앉아 나는 속으로 울었다. ‘아버님, 죄송합니다.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受之父母인데 미련한 아들이 그만 걱정을 끼쳐 드렸습니다.’ 내가 절을 한 뒤 꿇어앉아 지방紙榜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자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곁에 서있던 둘째 형님이 헛기침을 하였다.

차례를 마치고 나는 사촌형님들과 선산先山인 청마루와 독방굴 등 4곳에 영면永眠한 조상들을 일일이 찾아뵈었다. 가을 햇볕이 수북이 쌓인 아버지 산소에 술을 붓고 나는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나의 심정을 이해하였는지 형님들은 또 헛기침을 하며 내가 일어나기를 기다려 주었다.

성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어머니와 마주 앉았다. 나의 앙상한 팔과 다리 그리고 수술 부위를 만지며 어머니는 또 눈가를 적셨다. 나는 어머니에게 너무 죄송하고 송구하여 잠시 눈을 감았다. 수술 후 급속하게 빠진 살을 붙이기 위하여 무진 애를 써보지만 한번 달아난 살은 금방 돌아오지 않았다. 의사는 2-3년은 걸릴 거라며 음식에 각별히 신경을 쓰라고 하였다.

“너는 돌잔치 날, 실과 연필을 잡았고, 두 살 때 양잿물을 마시고 저승 문 앞턱 까지 다녀왔어. 그까짓 암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야. 어서 기운을 차려야 한다.” 나는 손수건으로 어머니의 눈가 잔주름 사이에 말갛게 퍼진 따뜻한 액체를 닦으며 억지로 웃어보였다. 수술 후 보다 많이 좋아졌으며, 머지않아 예전의 모습을 되찾을 거라고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하루 세 차례 약을 복용하고 휴식을 취해야 하기 때문에 빨리 인천으로 돌아와야 했다. 어머니는 차례를 지낸 송편과 과자가 담긴 종이 백을 아들의 손에 쥐어 주고 섭생攝生을 잘해야 한다며 신신당부하셨다.

막내아들이 탄 승용차가 복거리 산모퉁이를 돌아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함박눈을 머리에 인 어머니는 아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고, 막내아들은 ‘어서 들어가시라’고 어머니에게 손을 흔들었다.

다른 형제들과 달리 유년시절부터 어머니에게 자주 눈물을 요구했던 막내아들은 오늘 어머니가 흘린 눈물의 의미를 파악하느라 집에 돌아와서도 일찍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있다. 언제 어머니의 눈가에 진자리가 사라질지, 막내아들은 중천에 뜬 한가위 달을 보며 멀리 고향 하늘을 응시한다.

* 시인,소설가: 여강 최재효 <성산문학연구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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