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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스-향신료에 매혹된 사람들이 만든 욕망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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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ngel 댓글 0건 조회 2,599회 작성일 13-10-16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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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향과 매운맛을 내는 식재료로 사용될 때는 ‘향신료香辛料’로, 향수나 종교 의식에
사용하는 향의 원료로 쓰일 때는 ‘향료香料’로 번역되는 스파이스spice,
즉 시나몬, 클로브, 후추, 넛메그, 메이스 등은 탐험과 발견, 세계 재편의 촉매제였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과 유럽 각국의 아시아 쟁탈전은 스파이스가 가져다줄 부를 찾아 떠난 탐험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서출판 따비의 신간 《스파이스 ㅡ 향신료에 매혹된 사람들이 만든 욕망의 역사》의 저자
잭 터너는 유럽인이 향신료에 대해 이토록 엄청난 에너지를 쏟은 것은 단지 근대 시작 무렵뿐만 아니라
수세기, 심지어 수천 년 동안 지속된 일임을 상기시킨다.
 
 
I 향신료 전쟁
1장. 향신료를 찾는 사람들

풍미를 찾아 수많은 범선이 바다로 43
그리스도인과 향신료 59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논쟁과 충돌 78
파라다이스의 향기 98

II 미각
2장. 고대 세계가 탐닉한 맛

아로마넛, 향신료 원정대 129
향신료로 양념한 앵무새와 속을 채운 겨울잠쥐 요리 144
트리말키오니스를 위한 스파이스 153
쇠락, 몰락, 부활 173

3장. 중세 유럽의 구별 짓기
코케인의 향기 197
소금, 구더기 그리고 부패? 210
국왕을 시해한 칠성장어와 치명적인 비버 요리 232
퍼시 가문 따라잡기 248

III 육체
4장. 생명의 스파이스

파라오의 코 271
에베르하르트 대수도원장의 우환 293
천연두, 페스트 그리고 포맨더 319

5장. 사랑의 스파이스
구부정한 노인이 어린 처녀와 결혼할 때 331
뜨거운 것 343
스파이스 걸스 361
후기, 왜소한 음경을 위풍당당하게 만드는 비법 395

IV 영혼
6장. 신들의 음식

거룩한 연기 403
신의 콧구멍 425
신성한 향기들 437
구시대, 새 시대 449

7장. 담백한 맛 애호가
성 베르나르두스의 가족 갈등 463
부정 이득 489

에필로그 스파이스 시대의 종말 500
 
최초의 향신료 전쟁이었던 트로이 전쟁
스파이스에 대한 열망은 중세 이후가 아닌 고대부터 시작되었다


그대가 당당한 왕비의 모습으로 트로이의 도성을 지나가면
백성들은 새 여신 한 분이 강림한 줄로 믿을 것입니다.
당신이 가는 곳마다 시나몬 향이 타오르고
제물로 바쳐진 희생물들은 피로 물든 땅 위로 떨어질 것입니다.

파리스는 헬레나를 유혹하며 이렇게 말했다.
파리스가 말한 시나몬 향은 고대 사람들에게 ‘신들의 음식’이었고, 곧 헬레나를 ‘여신 대접’하겠다는
약속이었다.
16~17세기에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영국과 네덜란드 사이에서 아시아를 놓고 다툰 전쟁을
‘향신료 전쟁’이라 부른다.
이들이 아시아로 향한 이유가 향신료의 확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초의 향신료 전쟁은 그보다 훨씬 오래 전에, 파리스가 헬레나에게 약속한 시나몬이
일으킨 트로이 전쟁이었다.
독특한 향과 매운맛을 내는 식재료로 사용될 때는 ‘향신료香辛料’로,
향수나 종교 의식에 사용하는 향의 원료로 쓰일 때는 ‘향료香料’로 번역되는 스파이스spice,
즉 시나몬, 클로브, 후추, 넛메그, 메이스 등은 탐험과 발견, 세계 재편의 촉매제였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과 유럽 각국의 아시아 쟁탈전은 스파이스가 가져다줄 부를 찾아 떠난
탐험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서출판 따비의 신간 《스파이스 ㅡ 향신료에 매혹된 사람들이 만든 욕망의 역사》의 저자
잭 터너는 유럽인이 향신료에 대해 이토록 엄청난 에너지를 쏟은 것은 단지 근대 시작 무렵뿐만
아니라 수세기, 심지어 수천 년 동안 지속된 일임을 상기시킨다.
저자는 유럽인들에게 스파이스가 의미했던 것이 단순히 경제적 부만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고대로부터 유럽인들이 스파이스에 부여했던 다양한 의미와 상징이 부의 원천이
되었다는 것이다.
스파이스는 신성이자 천국을 의미했고, 사랑과 탐욕을 불러일으키며 유럽인들을 끊임없이 매혹시켰다.

스파이스에 매혹된 사람들
신성을 불러오는 신성한 향이자 영혼의 식재료 그리고 만병통치약이었던 스파이스


람세스 2세의 미라에서 발견된 후추 몇 알은 기원전 13세기에 이미 이집트와 아시아의 교류가
있었다는 고고학적 증거이자, 무엇보다 후추가 파라오의 육체를 불멸로 보존하기 위한 방부제로
쓰였다는 증거이다.
한편 로마인들은 시나몬 연기가 죽은 자의 영혼을 하늘로 인도한다고 생각했고,
중세의 그리스도인들은 스파이스를 시신에 바르는 것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따르는
길이라고 믿었다.
고대와 중세의 유럽인들이 스파이스에 신성을 부여한 이유는 물론 그 향 때문이었다.
사막을 가로지르고 바다를 건너는 스파이스 루트는 오래전부터 상인들에게는 잘 알려진 길이었지만,
세계의 크기를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유럽의 보통 사람들에게 스파이스의 이국적인 향은 미지의 세계,
즉 신들의 세계나 천국을 의미했던 것이다.
유럽인들의 영혼의 조미료였던 스파이스이지만, 스파이스의 용도는 세속에서도 다양했다.
스파이스는 무엇보다 특별한 식재료였다.
기원전 1세기경 잉글랜드에 주둔한 로마 군대는 입맛을 돋우기 위해 후추를 사용했고,
중세에는 와인의 시큼한 맛을 감추기 위해 다양한 스파이스가 첨가되었다.
흔히 알려진 것처럼 중세 사람들이 요리에 스파이스를 이용한 것은 싱싱하지 않은 고기의 상한 맛을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금에 절인 고기의 짠맛을 상쇄하기 위해서였다.
스파이스는 단순한 식재료를 넘어 건강을 위한 처방이기도 했다.
인간의 체질을 따뜻하고 습한 정도에 따라 나누는 체액론에 따라 대체로 건조하고 뜨거운
성질로 여겨진 스파이스는 차갑고 습한 음식을 해독하는 용도로 첨가되었다.
또한 스파이스는 만병통치약이었다.
염증을 치료하는 데는 후추가, 관절염 예방에는 시나몬이, 소화 기관의 질병에는 카시아가 추천되었다.
스파이스는 전염병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고도 믿어졌다.
나쁜 공기가 병을 부르고 좋은 공기는 방역의 방편이 된다고 생각했으므로, 스파이스의 기분 좋은 향은
치유의 향이었다.
구약성서에서 아론은 향로를 피워 여호와가 내린 역병을 피했고, 그리스인들은 향료를 바쳐 역병을
내리는 아폴론 신을 기쁘게 함으로써 역병을 피하고자 했다.
중세인들은 포맨더(휴대용 향료 통)를 가지고 다니면 천연두나 페스트 같은 전염병을 예방하고자 했다.
무엇보다 스파이스의 효과가 강조된 것은 바로 ‘사랑의 묘약’으로 사용될 때였다.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에서는 (베네딕트회의 수도사이자 탁월한 의학자인) ‘아프리카의 콘스탄티누스’의
조언에 따라 발기부전에는 생강, 후추, 갈랑갈, 시나몬, 여러 허브로 만든 미약을 점심과 저녁을 먹은 후
조금씩 복용했고, 아침 발기에는 우유에 담근 클로브를 먹었다.

욕망과 혐오 사이에서
권력과 부의 상징이자 금욕주의자의 적, 원산지의 비밀이 밝혀지자 매력도 사라지다


스파이스는 특별하다special. 실제로 두 단어는 어원이 같다.
이 특별한 매력의 원천은 바로 희소함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와 중세의 귀족과 왕족, 부자들은 스파이스를 남용함으로써 권력과 부를 과시했고,
상인들은 왕과 황제의 채무 증서를 스파이스와 함께 불태워 없앰으로써 권력의 비위를 맞추었다.
또한 중세 그리스도교의 엄격한 분위기에서도 입의 욕구와 몸의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스파이스를
갈구하는 성직자들가 있었다.
이러한 행태는 스파이스에 대한 혐오도 낳았다.
소박하고 절제된 생활을 옹호하는 고대 그리스ㆍ로마 시대의 풍자시인들은 신분을 과시하기 위해
스파이스를 남용하는 상류층을 날카로운 언어와 위트로 조롱했다.
중세 시대의 금욕주의적 종교인들은 욕망을 충동질하기 위해 스파이스를 사용하는 일부 성직자를
거침없는 언어로 꾸짖었다.

성서, 고대 그리스ㆍ로마 시인들의 풍자시, 요리책과 의학서, 교부들의 기록,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비롯한 유럽의 고전문학, 아랍의 문헌 그리고 대항해시대 탐험가들의 항해일지 등을 망라한 자료를
통해 그 매혹의 정체를 밝히는 저자는, 스파이스의 미스터리가 풀리면서 매력도 함께 사라졌다고 말한다.
스파이스를 찾아 세계를 주항한 탐험가들이 스파이스 산지를 가깝게 만들었고, 여러 스파이스는
원산지에서보다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에서 더 많이 생산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스파이스는 여전히 스파이시한 매력을 과시한다.
스파이스 채널에서, 스파이스 걸스에서. 혹은 코카콜라의 맛에서.

주요 스파이스

후추 : 학명이 피페르 니그룸Piper nigrum인 후추나무의 말린 열매로, 후추나무는 인도 남부 말라바르
해안이 원산지인 다년생 덩굴식물이다.
클로브(정향) : 학명이 쉬쥐기움 아로마티쿰Syzygium aromaticum인 클로브나무의 말린 꽃봉오리로,
원산지는 인도네시아이다.
넛메그(육두구) : 학명이 뮈리스티카 프라그란스Myristica fragrans인 나무의 열매 속 갈색 씨앗이다.
메이스 : 넛메그와 같은 나무 열매의 주황색 껍질로, 원산지는 인도네시아이다.
시나몬 : 학명이 시나모뭄 제일라니쿰Cinnamomum zeylanicum인 나무의 껍질로 실론 섬이 원산지인 육계이다.
카시아 : 학명이 시나모뭄 카시아Cinnamomum cassia인 나무의 껍질로 중국이 원산지인 계피이다.
생강 : 학명이 진지베르 오피시날레Zingiber officinale인 식물의 뿌리이다. 동남아시아에서 오래전부터
재배되었으나 인도가 원산지로 추정된다.

<책속으로 추가>

고대부터 중세 시대에 이르기까지 향료에서는 다른 세상은 물론이고 내세의 향기가 났다.
상류층 고인에게서 향료의 향이 난 것처럼, 향료에서는 죽음의 냄새가 났다.
이러한 오버랩은 특히 라틴어를 통해 분명해지는데, 사용되는 어휘가 같기 때문이다.
라틴어로 매장을 위해 시신을 염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시신을 “양념”하거나
시신에 “향료를 뿌리는 것”을 뜻하는 ‘콘디레condire’였고, 여기에서 ‘콘디멘툼condimentum’,
즉 양념이라는 말이 생겼다.
게다가 방부처리에 쓰이는 재료들은 일반적으로 부엌에서 쓰는 양념과 일치했다.(291~292쪽)

향신료는 오히려 직접적으로 해로운 영향을 미쳤을지 모른다.
시야가 제한된 시대에 1348년의 흑사병을 유럽으로 몰고 온 가장 그럴듯한 주범은 다름 아닌 동양에서
향신료를 실어오는 장거리 무역선이었다.
선페스트의 원인이 감염된 곰쥐(라틴어로는 라투스라투스Rattus rattus)의 피를 빤 벼룩에 물려 전파된
세균이라는 사실이 1320년대 중국에서 처음 기록되었다.
원래 동남아시아가 원산지인 이 쥐는 인도와 해상 무역을 하던 로마인에 의해 처음 유럽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
라투스라투스는 사막을 건널 수 없었지만, 후추를 싣고 바다를 건너는 상선을 얻어 탈 수 있었다
적어도 일각에서는 이러한 연관성이 향신료의 이미지에 타격을 주었고, 심지어 음탕한 동양이라는
오래된 미신을 자극했을지도 모른다.
아시아의 가장 가시적인 수출 품목으로서 향신료는 향신료가 자라는 동양에 대한 이미지들과 함께
유럽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래서 예를 들면 오트빌의 요한이 쓴 12세기 풍자시 〈아르키트레니우스〉에서 향신료가 비난의
대상으로 지목된 이유는 동양에서 왔다는 것과 성적인 특징 때문이었다.(352~353쪽)

이 부류의 수많은 시인들이 참고한 시의 원형은 놀랍게도 성서이다.
모든 의미에서 스파이스가 가장 많이 나오는 성서는 더 오래 전에 쓰여진 문구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기원전 3~4세기 무렵 집필된 것으로 생각되는 현재 시제로 쓰여진 아가서이다.
시나몬과 카시아는 사랑이 넘쳐나고 스파이스의 이미지가 풍부한 아가서에 반복해서 등장한다.(364?쪽)

향에 대한 혐오감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심해졌다.
박해를 받은 그리스도인에게 향료는 사탄뿐만 아니라 고통스러운 개인적 경험을 떠올리게 했다.
249년에서 251년까지 진행된 데시우스 황제의 박해와 303년에서 304년까지 진행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동안 그리스도인으로 판명된 이들은 황제의 그림 앞에서 제물이나 헌주를 바치거나 향을
태움으로써 교인임을 부인할 기회를 얻었다.
이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증명서를 받았고,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즉시 처형당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부패한 관리들에게 뇌물을 써서 박해에서 살아남은 것으로 보인다).
순교 대신 우상숭배를 선택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조롱의 뜻이 담긴 “분향하는 자turificati”라는
별명이 붙었다.(435쪽)

푸아브르는 궁극적으로는 대담한 인물이었지만 역사에 실제로 영향력을 미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향신료 무역이 쇠퇴하던 시대의 상징적인 인물로 남아 있다.
그가 쏟은 노력의 결실이 얼마나 늦게 찾아왔든 혹은 엇갈린 평가를 받았든 간에, 그럼에도 그의 노력은
이미 진행 중이었던 추세, 즉 고대부터 내려온 스파이스의 매력이 급속히 사라지던 당시의 추세를
강화하는 데 일조했다. 스파이스의 보급은 결국 스파이스가 흔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513쪽)

책속으로

사실 필자는 스파이스가 역사를 어떻게 형성했는지에는 별 관심이 없다.
스파이스를 둘러싼 세계가 어떻게 변했는지에 관심이 더 간다.
즉 스파이스가 왜 그토록 매력적이었을까,
그 매력은 어떻게 등장해 진화했고 결국 사라지게 되었을까,
그것이 궁금한 것이다.
향신료 무역을 가능케 한 향신료를 향한 욕망에 초점을 맞춘 이 책은, 무역에 관한 연구서가 아니라
그 무역이 존재한 이유에 대해 밝히는 책이다.(27쪽)

카몽이스는 서사시의 첫 번째 연에서 다 가마와 향신료를 찾아 떠난 그리스도인들이 “한 번도 항해한 적
없는 바다”를 탐험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스파이스 루트는 이미 수세기 동안 왕래가 있던 곳이었다.
다만 유럽인이 아니었거나 소수의 유럽인이 다녀갔을 뿐, 개척자들에게 흔히 있는 일이지만 그들보다
앞서 다녀간 이들이 존재했다.
아시아의 향신료는 유럽인이 아시아를 잘 알기도 전에 이미 유럽에서 친숙했으며, 누군가가 아니 꽤
다수의 사람들이 향신료를 구하기 위해 아시아에 다녀왔다.(106쪽)

주앵빌이 이해한 것처럼 공급처와 수요처를 가로막은 장벽 때문에 향신료가 이동하는 정확한 수단에
대해 아는 사람은 드물었고, 결국 수많은 억측을 낳았다.
창세기에 따르면 에덴에는 “흙에서 솟아올라 땅의 표면을 모두 적시는” 샘이 있었다.
중세 시대의 천지학이라 볼 수 있는 성서 주해에 의하면, 이 샘은 나일 강, 유프라테스 강,
티그리스 강, 비손 강(누구에게는 갠지스 강)의 수원이었다.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샘의 물줄기들이 불길을 우회하기 위해 지하를 통과한 후
지상으로 흐른다고 생각했다. 향신료는 바로 이 강을 통해 당도했다.(111쪽)

아피키우스에 의하면 로마인은 자극적인 맛을 좋아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령 현대의 요리책에 올리브 오일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면 그의 《요리책》은 향신료 일색이다.
후추만 해도 총 468가지의 요리법 중 349가지에 등장한다.
향신료는 채소, 생선, 고기, 와인, 디저트의 생기를 불어넣는 데 사용된다.(149쪽)

역사적으로 보아 향신료를 먹은 이유는 단지 맛 때문은 아니었다.
더 중요했던 이유는 멋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부유한 로마인에게 식탁(엄밀히 말하면 카우치, 식탁은 중세 시대의 발명품)은 자신의 세련됨과
후덕함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공간 중 하나였다.
공공연회 같은 행사야말로 이를 과시하기에 가장 좋은 기회였다(비싸고 화려한 음식으로 자신의
부와 관대함을 널리 알렸다).(159쪽)

현대 서구에서는 세속화, 온실, 냉장보관 덕분에 사순절 금식 기간 동안 단조로웠던 식단도 다양해졌다.
중세 시대 재력가들에게 이런 단조로움을 피하는 방법이 향신료였다.
소금과 다양성 부족이 중세 요리사들이 직면한 제약이었다면 향신료는 단조롭고 지루할 정도로 똑같은
식단에 활기를 불어넣었다.(219쪽)

뜨거운 계절에는 차가운 음식이 좋고, 추운 계절에는 뜨거운 음식이 좋다.
따라서 더운 여름에는 향신료를 적당히 혹은 아예 사용하지 않는 편이 나았던 반면, 춥고 습한 겨울에는
새고기처럼 뜨겁고 건조한 음식을 구워 향신료로 양념한 육류를 먹는 계절이었다.
가경자可敬者 비드(762?~735)는 클로브와 후추에 대해 겨울에는 사용하고 여름에는 자제하라고
충고했다.(241쪽)

현대와 마찬가지로 중세 시대에서도 과시의 극치는 자랑하거나 드러내거나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이 었다.
15세기 초반 런던의 시장은 왕의 차용 증서를 시나몬과 클로브를 넣은 불 속에 던져 공개적으로
태워버림으로써 헨리 5세(이자 채무자)의 비위를 맞췄으니, 허영을 뜻하는 향신료 장작더미에서
피어오르는 향긋한 반전이라 하겠다. 헨리 5세는 감명받았다.
그는 고마움에 “이러한 신하를 가진 왕은 없었도다”라고 중얼거렸다.(257~258쪽)

장례에 향료를 사용한 가장 유명한 시신은 부유한 로마인이 아니었다.
고대 유대의 가난한 평민이었다.
루가복음과 요한복음에 따르면, “유대인의 장례 관습에 따라” 예수의 시신을 향료와 함께 아마포로 감쌌다.
향료와 함께 그리스도의 시신을 안치한 것은 당연히 가장 영향력 있는 전례가 되었다.
그리스도 시대에는 많은 이들이 예수의 장례 관습을 따랐다. ……
예수 그리스도의 방식으로 매장되는 것보다 더 그리스도적인 죽음이 어디 있겠는가?(279~2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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